<해외기획-인도네시아 기행문(1)> 이름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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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17 [17:31]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된 것은 가난했던 집안의 기둥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그러나 멋지게 살았던 큰오빠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반세기 전 오빠는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했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가 살았던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보는 것이 나의 숙원이었다. 

오빠는 왜 인도네시아에 살게 되었을까. 사무엘 김이라는 뉴욕 타임즈 기자는 1973년 3월 19일 이런 기사를 썼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경제 성장의 기반을 어느 정도 이룩한 한국이 경제개발이 절실한 인도네시아를 돕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열대 산림에서 자란 틱크나 마호가니 원목을 수입하고, 동시에 그 나라의 건설산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성세대는 50여년 전 인도네시아 나무로 만든 보르네오 가구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또 삼환기업 같은 건축회사가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는 사실도기억할 것이다. 큰오빠도 당시 인도네시아 건설사업에 참여했었다.  

로스안젤레스를 떠나 하루 이상을 길 위에서, 또 하늘에서 보내고 드디어 인도네시아 발리에 도착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1만7천 개 섬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는 미국 텍사스주의 세 배 면적으로 2억 3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700여개의 언어와 6개의 종교가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종교, 인종들이 모여서 살지만 마찰 없이 어우러져 잘살고 있다. 다인종 국가에 살고 있는 필자로서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인도네시아는 1800년부터 네델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906년 발리 왕국을 중심으로 네델란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관총과 대포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네델란드 군이 궁성 앞에 도달하자 왁과 발리인 약 1천명이 항복보다 죽음을 택했다. 발리 왕국은 몰려오는 네델란드 군을 향해 저항의 의미로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는 이 사건을 ‘푸푸탄’투쟁이라고 한다.

우리가 삼일 만세 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듯이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네델란드 통치시절부터 여러 번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다시 돌아온 네델란드에 대해 다시 독립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세 운동 당시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견지한 반면 그들은 직접 자신들의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대비된다. 

▲ 발리에 있는 푸푸탄 바둥 기념탑     ©울산광역매일

사진의 ‘푸푸탄 바둥’ 기념탑에는 봉기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조각돼 있다. 어린아이들도 봉기 때, 어른들과 함께 푸푸탄을 했다는 뜻이다. 이 기념탑은 푸푸탄이 제일 많았던 광장에 세워져 있어 의미를 더한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 공원으로 달려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희생된 조국의 수많은 조상들이 생각났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때 식민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과 인도네시아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없는 애국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양쪽 나라에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또 한국이 그랬듯이 그들도 성장통을 겪어오고 있지만, 그들은 지금부터 20년 후인 2045년이 되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수필]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이 있거나,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다. 또 충동적으로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이었을까? 나는 늘 허기가 지었던 것 같다. 육이오 전쟁 중에, 그리고 그 후에 한국의 모든 국민이 힘들고 가난했던 때에도 우리 식구들은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집이 부유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쪼들리는 살림 중에도 엄마의 지혜로운 가정 행정의 운영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에는 배고파 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배가 고팠다. 집을 떠났을 때부터이었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형체를 구별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촌스러울지언정 단순하고 상큼했던 엄마의 밥상을 텅 빈 벌판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회오리바람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갔던가.

인턴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났다. 오 십여 년 전 한국의 인턴들은 당직 숙소에 기거해야 했다. 하루 건너서 당직이므로, 당직을 선 시간과 낮 근무까지 합쳐서 24시간 일하고, 그 다음 날 정규 일과를 계속해야 했던 때라 인턴 숙소에서 일 년간 살았다면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인권, 노동법, 의료 수련의 법 위반이라 그리하지 못한다. 어떻든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을 가끔 방문하던 손님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나를 안아주실 때 풍기던 익숙하고 따뜻한 체취, 반찬 냄새가 배어있는 엄마의 남루한 옷자락이 엄마가 끓이신 된장찌개와 풋김치가 올려진 단순하고 가난했던 밥상과 함께 멀어져 갔다. 엄마의 가슴과 나 사이에 있던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의 구름다리 밑에도 그녀의 남루한 옷, 가난했던 밥상, 신선한 풋김치가 더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인턴 생활이 전공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도미하였고, 나는 부모님을 방문하기에는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다. 불쑥 엄마에게 나타나서, ‘엄마, 나 배고파!’ 말하던 삶의 한 단편은 이미 지나고 난 후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허기를 엄마와 연결하여 본다.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에게 할애하는 기억은 불공평하다. 당신은 전쟁· 최루탄 연기· 남루함 안에서 표정을 잃은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로 세상을 보고 계시다. 그 시대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단 한 장 흑백 가족사진 속에 있는 그녀는 슬프다. 그 사진 속에는 그녀의 큰아들은 없다. 아들의 아내도 없고, 아들의 큰딸이 나와 함께 앞줄에 웃지 않고 서있다. 그녀의 눈동자와 입매가 엄하다. 한때는 빛났을 당신의 젊음과 웃음을 떠나보내고, 기뻐하여도 된다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그 시대 어머니들의 모상(母像)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70년대에 도미하실 때까지, 40여 개의 전쟁으로 점철된 땅에서 사셨다. 일본의 속국인 나라 잃은 국민에게 일본이 관련되었던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은 조선인들의 전쟁이 아니었던가. 

여러 전쟁을 겪을 때 엄마와 함께했던 나의 손위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대신, 아버지 목마를 타고 피난 길에 올랐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구경했을 터이다. 그러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 전쟁의 잔재인 가난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입학 후에 목격하였던 학생혁명과 이어서 발발한 군사혁명으로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 그중 하나이었다. 쌀 생산량에 비해서 인구가 많았던 한국은 일주일에 하루는 밥 대신 식빵을 먹을 것을 장려했고, 매가지 없는 월남 쌀을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채워야 했다. 출생률이 너무 높다고 판단되었던 때라서 시골 보건소에서는 피임약을 집집마다 다니며 나누어 주었던 때이었다. 그러했던 격동기에, 엄마는 말이 없으셨다. 세상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의 배고픔은 허기(虛飢)가 아닌 허기(虛氣)가 아니었을까? 허기라는 두 글자는 한문으로 달리 쓰이고 뜻이 다르다. 허기(虛飢)란 실제 굶어서 생기는 배고픈 증세를 뜻하고, 내가 겪어온 것은 허기(虛氣)가 맞는다. 내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것은, 정신적, 감성적 허기이다. 

의학에서는 배고픈 이유를 당뇨, 저혈당, 스트레스, 저단백질 음식 섭취, 갑상샘 기능 결핍, 수면 부족, 임신 등 열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그 외에 질병의 이름이 붙여지는 ‘먹는 상황’과 관련된 예도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욕망,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 등 정신적인 또 감성적인 뇌의 기능과 관련된 질병들이다. 

나의 갈증(渴症)을 유발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또 내가 갈구(渴求)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실질적인 부재(不在)와 영적인 부재(不在)에서 온 것이다.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반찬 냄새가 밴 당신이 없다. 먼 곳을 바라보시던 절망과 단념의 눈동자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졌던 엄마에 대한 연민은 머지않아 내가 이승을 떠날 때 대(代)가 끊길 것이다. 이 사이클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2.13.2025

USC KOREAN STUDIES: MEET THE HERO SERIES

Doheny Memorial Library (DML), 240View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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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0 Trousdale Parkway, Los Angeles, CA 90089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tFgkMBczYNNJPmHw6p82U-3ZUdxui-IL8y63w9RugZQ4tfA/viewform

Wednesday, February 19th, 2025 | 5PM – 7 PM | Doheny Memorial Library  240 – Friends of the USC Libraries Lecture Hall

Born in post-war Korea, Dr. Ryoo overcame significant economic hardship to become a renowned radiation oncologist with a career spanning over 50 years. Throughout her career, she has treated countless cancer patients and earned prestigious awards. This program will feature music, a Q&A session, discussions, and networking opportunities for students, scholars, and the public, making it a unique and engaging event. This isn’t your typical lecture! Join us for an exciting, fun-filled event with great music and engaging content. Light refreshments will be provided. 

* RSVP is required.

Hosted by USC Korean Studies Institute

Co-sponsor: USC Libraries Korean Heritage Library

귀중품: 울산광역매일 신문 오피니언

<해외기획-캘리포니아> 귀중품
 
류 모니카 수필가ㅣ   기사입력 2025/02/02 [16:59]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2025년 새해 첫 주에 내가 사는 곳 인근에 있는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산불이 났다. 오십여 년 전에 미국 동부의 뉴욕주 북부지방 시러큐스에 있는 뉴욕주립대학으로 유학 왔던 나는 수련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정착하여 살고 계시던 도시인 로스앤젤레스로 직장을 잡았다. 이 도시는 살기 편하고, 경치 좋고, 다인종이 함께해서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남쪽 캘리포니아주(州)에 있다.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라 영하로 내려가는 추운 날이 거의 없고, 대신 여름, 가을철에는 인간의 체온과 비슷한 38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가는 더운 날이 많다. 습하지 않기 때문에 불쾌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다인종의 나라인 미국의 대표적 도시라서 그런지, 동양인을 홀대하지 않는다. 동양인이 많아 좋지만, 단점도 있다. 인종 차별을 피하고 사회정의 실현 정책의 일관으로 많은 주립 대학은 비례제 입학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다 보니,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통의 학생들에게 할당된 수와 동양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수가 비슷하여도, 고등 교육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동양계에는  많으므로, 명석한 동양 학생들끼리 서로 경쟁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원하는 곳에 입학이 어렵다. 비례제도에 쓰는 자료는 가져온 것이다. 

퍼시픽 팰리세이드는 태평양이 서쪽에, 산타모니카 산맥이 동쪽에서 안고 있는 형태이다. 경부고속도로의 2.5배 이상의 장거리인 1번 하이웨이가 남쪽 샌디에이고 시작점에서부터, 북쪽 샌프란시스코까지 이 지역을 관통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하루 날 잡아서, 드라이브도 하고 계획 없던 피크닉을 해변에 머물면서 즐길 수 있다. 모국의 동해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곳도 많이 있다.  

퍼시픽 팰리세이드 집들이 전소되기 전에는 태평양 해변을 따라 주택가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건축업자들이 산을 깎아서 개발한 산 동네에도 마을이 있었다. 거부들은 해변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큰 저택을 짓고, 자기 개인 소유의 해변을 갖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이 해변 곳곳에는 여러 에스닉 푸드를 만드는 레스토랑이 있어서, 서민들은 갑부들의 호화판 환경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등산, 수영 이외에도 원조 게티 뮤지엄에 들려서 귀한 미술품을 관람하거나, 근방 말리부에 있는 페퍼다인 대학에서 세미나에 참석할 수도 있는 멋진 동네이다.

울산이나 강릉항처럼 어선이 정박하여 서로 싱싱한 해물을 건네는 풍경은 볼 수 없다. 바닷가이지만 생선 냄새는 없고, 미역 냄새만 있다면, 조금 이상한 표현일까?

퍼시픽이라는 말은 피스(peace:평화)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고, 팰리세이드란 옛날 말뚝을 박아서 울타리를 만들어 경계를 짓는다는 뜻이다. 이곳에 산불이 났다. 덥고 건조한 광풍이 불어서 불은 미친 듯이 퍼졌다. 삽시간에 동네가 타들어 가고 불똥은 80킬로미터, 100킬로미터 멀리까지도 날아가서 새로운 불을 지폈다. 집과 비즈니스 건물들은 형체를 잃고 땅에 잿더미가 되어 주저앉았다. 나는 이 산타모니카 산의 다른 편 쪽에 살고 있는데, 불이 내가 사는 쪽에 도달하려면 두 개의 계곡을 넘어야 한다.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던 산불로 12,300개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상자도 있는데, 이 와중에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들도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바람으로 불똥이 멀리까지도 튈 위험이 있어서,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산등성이 위로 뭉게뭉게 올라올 때, 방위군과 소방대원, 경찰이 대피 명령을 전달하였다.

시간적, 정신적인 준비 없이 여권과 랩탑 컴퓨터, 전화만 들고 단벌 신사로 집을 나섰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차를 운전해서 일단 집을 떠났다.  우리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 불에 타서는 안 될 ‘귀중품’이 무엇일지 순간 생각해야 했다. 아니,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이들 어렸을 때의 기록들,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남편과 친구들이 보내 주었던 편지, 100년도 넘은 외할머니와 부모님의 퇴색한 흑백 사진들이 우선 뇌리를 스쳤다. 많은 미술 작품과 사진들은 액자 안에 감금되어 있는 형편이어서 아픈 마음을 그들과 함께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몇 개의 액자들을 내려서 갖고 오려고 모아 놓다가, 그 또한 부질 없다 싶어서 모두 두고, 떠났다.  
비행기로 2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뉴멕시코주(州)의 딸네로 갔다. 손주들과 닷새를 함께 했다. 어수선하고 힘들었던 때였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기회를 선물로 받았다. 엘에이 여러 기관과 관공서에서는 응급상황에 맞추어서 계획했던 행사를 과감히 취소하고 재조정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엘에이 한인의 날 행사도 연기되었다. 함께 하는 마음으로, 리더십을 갖고 결정을 해 주는 분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염려하지 않았다. 염려나 걱정은 미래의 것이고, 나는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뉴멕시코에 있는 코스트코에 가서 허드레 갈아입을 옷도 샀다. 이 ‘화마 탈출’ 기간 동안 친지들은 걱정 말고, 용기 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영리단체인 한국어 진흥재단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미국 중부에 살고 계시는 이사님은 매일 성서 구절 한 개 또는 두 개씩을 보내 주시었다. 뽑힌 구절들은 주로 마음과 영혼을 믿음 안에서 강하게, 담대하게 하면 세상은 전능하신 분이 모두 정리하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구교 신자이고 그 친구는 신교 신자이다.  산불은 우리 쪽의 산까지 퍼지지 않았다.

‘아, 정말 행운의 신이 우리와 함께했어! 우린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산불로 과거의 흔적을, 조상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의 희망 담긴 메시지 일부 또는 모두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물건은 사면 되고,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 귀가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언제 그런 환난이 있었느냐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에게 진정한 귀중품은 과연 무엇이었나? 진주,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아니었다. 훌륭히 만들어진 양복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과거로 자꾸 돌아가게 하는 부모님에 대한 추억, 그분들의 사진들, 아이들과 함께했던 행복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던 순간들을 엮은 물건들, 환자들이 준 물건들이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는 글로 쓴 것들-일기, 편지, 증명서 같은 것들은 모두 온라인 기구를 이용해서 저장하려 한다. 사진들도 스캔해서 같은 방법으로 저장하면 되겠다. 그리고 한군데에 모아 두면 된다. 세면도구 넣을 만한 가방이면 소장이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가! 아니면 공중에 있는 구름(iCloud)에 저장하여도 된다.  뒤돌아보지 말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미국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
미주 중앙일보 ‘오픈 업’ 칼럼니스트 
재외동포재단 문학상, 재미수필 신인상, 미주 가톨릭문학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