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게티 미술관 단상(斷想)

내가 봉사하고 있는 한국어 진흥재단의 미래 사업 건으로 모국의 관료 한 분과 디아스포라 차세대들의 교육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다른 관료를 만났다. 

행사에 참석하기 전 우리는 J. 폴 게티 전시관을 구경하기 위해 한인타운과 공항 중간지점인 브렌트우드에 있는 폴 게티 센터에서 만났다. 29년 전, 1997년에 개관된 게티 센터에서는 맑은 날 카탈리나섬, 태평양, UCLA, 다운타운 등을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조경이 완벽하다. 

J. 폴 게티 미술관, 게티 연구소, 게티 보존연구소와 게티 재단 등이 센터 안에 있다. 재단은 집안의 부(富)를 사회 전반, 특히 교육, 문화, 예술 진흥을 위해 재투자한다. 약 1,400명이 J. 폴 게티 트러스트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985년 이후  50개국 이상, 약 1,300명이 ‘게티 장학금’ 대상자로 선발돼 장학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장학금 수혜자들은 현재 재료과학, 화학 분야 등에서 20명 이상이 연구자나 전문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세대와 차세대를 위해 체계적으로 장기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전시관 본관은 주차장에서 전기 트램을 타고 가거나, 등산하는 식으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휘발유 배출 물질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차장까지만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출입이 허용된다. 방문객들은 전력을 이용한 트램을 타고 주차장에서 본관까지 왕래한다. 

폴 게티 뮤지엄에는 유화, 판화, 조각, 사진 등의 다양한 소장품이 있다. 마침 특선으로 빈센트 반 고흐, 세잔느 등 인상파 낭만주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테오도르 제리코 (1791~1824) 의 모델 습작이 벽에 걸려 있었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33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의 완성된 작품이나 습작 중에는 흑인 노예의 상체 그림이 많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이어, 1800년대 초에 살았던 그는,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 계급제도의 비참함, 빈곤, 죽음, 사회 정의의 부재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속의 흑인들은 비애, 고통, 연민의 눈으로 그림을 대하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초라했지만 그림 속 노예들은 숭고한 모습이었다.

모델 습작은 그의 다른 그림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대작 ‘메두사 뗏목’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그림들을 이해하려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프랑스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전에 잃었던 식민지를 재정리 중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아프리카 서해에 있는 세네갈을 향해 떠났던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400명 중에 구명보트를 타지 못한 150명이 뗏목에 버려지고, 12일간 바다에서 표류한 끝에 15명이 구조되었고, 그중 최종적으로 5명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그림으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그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림에 나타난 한 흑인 남성의 얼굴, 남루한 구멍 난 재킷 등은 보는 이들의 눈이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하도록 하는 무엇인가 슬픔이 담긴 듯했다. 검은 피부의 눈매를 가진 그는 삶의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는 하류층 노예이었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게티 센터는 이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센터를 돌아 나오면서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던 스메타나의 ‘몰다우’는 그 자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르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지배당하던 체코슬로바키아, 한국, 아프리카 식민지, 노예 등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는 이날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되뇐다. 나는 행복해야 하고 그 행복함을 정당화하는 축복에 감사하고 또 이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2026.8.18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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