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다!

분주하다는 핑게로 한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서류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글들, 일기를 쓴 책들을 구분해서 치우다가 40년 하고도 한 달 전인 1979년 3월 29일, 낮에 썼던 일기를 보았다. 수련과정 마지막 해로 병리학 교실에 순환근무를 갔던 때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양방사선학 수련의 과정을 뉴욕주립대학 업스테이트 과학센터에서 받았다. 수련의들은 본인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또 다른 특수 전문과에 순환근무를 하므로서 본인의 전문성의 판도를 넓히고 심도 깊은 의학을 연수해 간다. 나의 전문직에는병리학, 진단방사선학, 종양내과학, 종양외과학이 필수적인 로테이션이다.

일기 이야기를 조금 하고 지나간다. 나는 의과대학 시절 부터 일기를 가끔씩 써 왔다. 일기를 아무 때나 쓴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번 끼적인 경우도 있다. 매일 쓰지도 않는다. 되 돌아가 읽는 적은 드물다. 언젠가 쌓여 있는 일기책들을 모두 소각하리라 마음 먹고 있다.

이 40 여년 전에 쓴 일기는 반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큰 딸에게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큰 딸은 세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젊은 엄마,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 안타까와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시대적 우울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쓰면서 엄마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가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시시껄렁한 미국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미국사람들이란 백인 남자 의사들을 칭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는 이 일기를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일기장 노트의 공간에 인종차별에 대한 내 마음을 끄적였던 1979년 보다 일 년 전인 1978년에 다민족 사회의 미국은 5월 첫 열흘을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이하 아태문화유산)의 날’로 정했다. 5월은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처음 디딘 달(1943년)이고, 중국인들의 노고로 미국대륙횡단 기차길이 완성된 달(1896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4년 후인 1992년 상원은 열흘이 아닌 5월 한 달 동안으로 늘렸다.

미국의 인권운동이 있었던 1960년 대 이전에는 동양인을 ‘오리엔털’이라 불렀다. 이 단어는 약간 모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가에서 중국, 필리핀, 일본계 학생들의 끈임없는 투쟁과 하와이 상원의원이었던 일본계 팻지 밍크, 미시간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중국계 청년 빈센트 친 인종오해-살인사건등이 ‘아태문화 유산의 달’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보아도 된다.

빈센트 친은 자동차업조계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양아들에 의해 살해된 청년이다. 당시 일본산 작은 자동차들의 수입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는 경제적 타격을 크게 받았다. 빈센트를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증오감에서 저지른 살인범죄였다. 감옥형이 아닌 3천불의 벌금과 집행유예로 가볍게 처리된 이 사건을 ‘삼천불 짜리 살인 면허’라고 할 정도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1860년에 미국 인구의 0.1%였던 아태계는 15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겨우 4.8%를 차지하고 있다. 40대 중반이 된 큰 딸은 나 처럼 종양방사선 전문의가 되었고, 교육에 관심을 둔 박사인 둘째 딸은 미국공립중고교 내의 기기(器機)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화내지 않고 시간은 걸리지만 실력을 쌓고 내공을 기르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동굴교회’와 ‘쓰레기 마을’ (II)

교회를 돌아보고 있는 나에게 한 남자 노인이 접근해 왔다. 무척 친절했다. 교회에 관한 얇은 책자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노인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약간의 영어를 하던 그 노인은 처음에는 20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야박하지만 5불로 낙찰을 했다. 내 마음에는 책자를 보지 않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더 줄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하다.

돈을 주고 받은 책자에는 동굴이 생긴 기적과 기적을 일으켰다는 콥틱기독교의 성인, 외눈박이 성 시몬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성 시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며 살다가 자신의 눈 하나를 빼어 버렸던 사람이라고 한다. 봐서는 안 될 무엇을 보았길래 성 시몬은 한 눈을 빼어 버렸을까.

이 동굴이 생겨난 기적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콥틱 기독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예수님의 제자 마르코가 서기 42년에 세웠다. 이집트가 모슬렘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면서 기독교인들에 가해지는 박해는 심해졌다. 서기 10세기에 카이로 파티마(Fatima) 왕조의 칼리프 알 무이즈 (Caliph al-Muizz)는 각 종교 수장들을 초대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종교적인 디베이트를 하게 하곤 하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당시 유대인 대표가 기독교인들의 대표 알렉산드리아의 62번째 교황 아브라함을 골탕먹이고 크리스챤을 박해할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의 간교로 칼리프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마태오 복음 17:20을 인용하면서 모카탄 산을 움직여 보라고 명령했다. 만약 산을 움직일 수 없으면 모든 기독교인들을 순교 시켜야 한다는 충언과 함께.

아브라함교황은 ‘매달려있는 교회(Hanging Church)’ 라고 불리우는 교회로 사제들, 부제들과 교회원로들을 불러 함께 사흘을 단식하며 기도하였고 이때 일반교인들도 합세 하였다 한다. 이 교회는 바빌론 성곽에 있는 관리실 위에 교회의 중심부가 얹혀진 형태로 지어진 교회이어서 ‘매달려있는 교회’라고 불리운다. 지금도 있는 오래된 교회이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그는 환시를 보았다. 성모님이 발현하시어 그에게 저잣거리로 가서 외눈박이 무등쟁이(구두만드는 가죽을 다루는 사람) 시몬을 만나면 그가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시몬은 아브라함 기독교 교황에게 칼리프와 칼리프의 군대, 사제들, 시민들 모두를 산 앞으로 집합하라 일렀다. 그들 앞에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를 세번 외치면서 산을 향해 십자를 그으라고 알려 주었다 한다. 실로 기적이 산을 가르었고 갈라진 산 사이에 거대한 동굴이 생긴 것이다. 기적이 일어 난 직후, 뒤 돌아 보니 이미 외눈박이 성 시몬은 보이지 않았다.

외눈박이 무등쟁이는 콥틱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성유물이 1991년 카이로 ‘성스러운 성모의 콥틱 동방교회’라고 불리우는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교회를 수리하던 중, 성당 지하 겨우 1미터 밖에 안되는 깊이에 성유물이 뭍혀 있었다고 한다.

기적을 보아야 믿는 우리들을 경고하신 예수님이시지만, 기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기적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시었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눈에 띄일 수도 있고 비밀스러울 수도 있는, 공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기적의 연속이라는 것을 ‘동굴교회’와 묵언의 간증으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쓰레기 마을’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확인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말일까?

2월의 여행은 나 같은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얍삽한 나의 인식과 달리,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보게 했다. 이는 나날의 기적, 기적을 초대하는 기도와 침묵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경고한다. 바쁘고 분주하고 번쩍이고 기름진 현대 생활은 아무리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미디어 섹션에 있습니다.

크리스챤위클리에 실린 글입니다. 2019.5

 

‘동굴교회’와 ‘쓰레기 마을’ (I) : 이집트를 다녀와서 (사진참조)

‘동굴교회’는 카이로 모카탐(Mokattam) 산 절벽 쪽에 있는 동굴안의 교회들을 말한다. 모두 7개가 있다. 그중 제일 큰 교회는 깍여진 절벽 밑으로 형성 된 거대한 동굴 공간 안에 있는데 2만 명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곳이다. 이 교회들은 이집트 카이로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집단이 만든 공동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동굴교회’를 가려면 쓰레기 수것군의 집단, 제벨린 (Zabbaleen)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쓰레기 마을’을 지나야 했다. 말 그대로 쓰레기 마을이었다. 카이로에는 최근 까지 쓰레기 수거를 정부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료로 전역 가정집들에서 쓰레기를 수거해다가 다시 활용 할 수 있는 물건들을 추려서 수리한 후, 이것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자급자족의 집단이다. 또 쓰레기 중 사람들의 오물을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의 먹이로 써왔다. 약 2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했다. 말 대로, 쓰레기가 길 양 옆에 쌓여 있는 좁은 중앙 통로 길을 지나야 했다. 더러웠다. 악취가 불쾌했다. 곳곳에 쓰레기 마차를 끄는 당나귀들, 우리들이 똥차라고 부를 정도의 고물 소형 트럭들이 있었다. 어떤 당나귀들은 제 몸체보다 더 많은 접은 카드보드를 등에 업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마차군들은 대부분이 청년들인 것이 희안하게 보였다.

길이 좁아 대형 버스에서 작은 버스로 갈아 타고 이 마을을 지나 동굴교회에 도착했다.

제벨린들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 지나가고 싶다. 이들은 상(上) 이집트에서 살던 농민들로 1940년 기근으로 인해 집단이동을 했어야 했다. 상 이집트란 아스완 문화와 왕국이 있었던 남쪽 이집트를 말하고 하 이집트란 지중해 가까운 지역 즉 북쪽 이집트를 가르킨다. 우선 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죽음의 지역, 즉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 나일강 서쪽 기자(Giza)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핑크스, 피라미드들이 있다. 파라오들이 생전에 자신이 묻힐 무덤을 만들었던 곳이다.

1970년 갑작스런 기자 행정부의 출퇴명령으로 사흘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던 그들은 모카탐이라 불리는 산 옆구리 지역이었다. 실상 그들에게는 농사를 짓는 것 보다, 쓰레기를 모아서 재활용품을 찾아내고, 수리해서 파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도움이 되었다한다. 당시 이집트에는 개인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정부의 체재가 없었다.

이 제밸린들의 대(代)를 물리는 빈곤한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보니 건강 유지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보면 좀 오래 된 통계이긴 하지만 1990년-1995년 사이에 신생아 사망률이 카이로 일반 시민들의 그것보다 세배가 높았다고 한다. (1000 명에 45.6명 vs 117명).

이들의 특징은 90%가 콥틱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는 조건으로 이곳으로 쫓겨오고, 대대로 쓰레기를 주워다가 재활용하면서 살아온 그들이지만 모슬렘 정부의 핍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하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기에 빈곤을 받아들이고, 비록 잘 살수 있는 환경으로 발전한 경우에도 이 쓰레기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길을 지나가며 본 얼굴들은 나에게는 무표정으로 보였지만, 불평의 얼굴 표정은 아니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교회 공동체가 이루워진 것이 1975년다. 한 해 후 교회가 화제로 피해를 보게 되면서 동굴안에 새교회들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들이 세운 동굴안에 있는 교회들이 보여 주는 믿음은 고통의 신비를 새삼 생각해 보게 하고 방문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또 동굴의 거대함은 전능하신 분의 자비로운신 허락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한다.

크리스챤위클리 2019. 5

사진은 미디어 섹션에서 보십시오

 

충녕군(忠寧君) 이도 (李祹)이셨던 세종대왕님께! (사진참조)

가을 햇빛이 엷습니다. 시월 상달도 어제로 멀어져 갔습니다. 아열대 지방 엘에이도 가을 빛이 진합니다. 단풍이 드는 가로수가 심어진 길을 지나다 보면, 떠나온 모국의 가을과 다를 바 없이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세종대왕님,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여자이고 의사입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지난 달 한글날에 ‘미주 한국어진흥재단’ 이 한글발전에 유공했다 하여 대통령으로 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우선 세종대왕님, 당신은 당신의 이름 (諱字) 이 세종이라는 것을 모르시지요? 저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종묘에서 당신이 세상을 뜬 후 신주 묘호(廟號)를 세종이라 부르게 된 것은 후임 왕과 조정대신들이 그리 정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의 과학성, 창의성과 그 위대함을 이번 한국 방문 때에 다시 보았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국민이 쓰는 글이 언제, 왜,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진 것은 한글 이외에는 없습니다. 한글박물관도 참 멋있었습니다. 조선후기 상류층에서도 한글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고,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다섯살 때 외숙모에게 보냈다는 한글 편지도 보았습니다. 삐뚤 빼둘한 어린 이산(李祘 : 정조)의 한글로 쓴 붓글씨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 때 얻은 한글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앞으로 한글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줄 것입니다.

올해로 당신이 즉위하신지 600년, 한글이 선포된지 572년이 됩니다. 한국 밖에 있는 한국인의 숫자는 7백만이 넘습니다. 미국학교에서는 영어를 쓰고 영어 알파벳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다양한 외국어 클래스들을 제공하고 있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남한의 99배나 되는 큰 땅을 가진 나라로 훈민정음 선포 후 330년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이런 큰 나라 곳곳에 한국교민들이 살고 있고, 차세대들은 미국 교육을 받고, 주류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면서도 역시 한글, 한국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둘째 아들,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뿌리 깊은 나무’를 노래하고 있듯이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던 한국인의 뿌리를 내리는데 성실합니다.

‘미주 한국어진흥재단’은 주말학교와 달리 비혈통 학생들을 위해 미국 정규 중고교에 한국어 클래스를 신설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서 한글은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하게 되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고 써 있듯이 한국어 클래스를 택하는 비혈통 미국 초중고교 (6살 부터 17살)학생들이 쉬 배울 수 있습니다.

저희 재단이 하고 있는 한국어진흥 방법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한글을 통해, 또 테크놀로지를 과학적인 한글에 접목해서 앞으로 더 많은 기적들이 한글을 통해서 일어 날 것을 예지합니다.

한글날 광화문 광장, 당신의 동상 앞에서 세상과 참석한 친구들이 저를 보고 있는 가운데 재단을 대표해서 대통령 상을 총리님에게서 받을 때, 청와대 지붕 넘어 보이는 북악산 능선이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태어난 삼청동과 제 모교가 있던 정동 1번지가 동쪽과 서쪽에서 저를 감싸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저의 뒤, 남쪽에서 저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충녕군(忠寧君) 이도 (李祹)이셨던 세종대왕님, 감사드립니다! . 뿌리 깊은 나무로 살아가는지 늘 봐 주십시오. 다시 쓰겠습니다.

2018년 한글날 한국어진흥재단이 한글발전유공단체로 대통령 상을 받고 나서 쓴 글. 나는 한국어진흥재단의 이사장 자격으로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