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문교부 그리고 ‘한국어진흥재단’

열 살도 되기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있었다.  여름비를 맞고 있는 닭들이 슬퍼 보였다.  갈 곳이 없다는 머언 아버지 지인의 아들이라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여름비가 오던 그 날, 아저씨는 구속되었다. 병역기피 죄목으로 끌려가던 아저씨의 뒷모습이 초라해서 슬펏다. 비 맞고 있는 보라색 백일홍 꽃도 슬퍼 보였다.

청소년 시절을 한국서 지나고 나는 뉴욕주 Upstate, Syracuse 에 있는 뉴욕주립대학병원에서 종양방사선학 수련의 과정 후 엘에이에 정착했다. 어느 날 오피스 근처 홈디포에서 집 없는 까만 고양이를 보았다. 애처러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녀석을 보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저씨의 초라했던 어깨는 위험을 무릅쓰고 던져주는 밥에  살금살금 가까이 오던 홈리스 까만 고양이의 매말라 드러난 등판의 등골뼈 위로 겹쳐저 다가왔다.

이렇게 홈리스 고양이들 때문에 연관이 된 기관이 한국어진흥재단이다.

‘무슨 소리?’ 라는 반문은 ‘한국어진흥재단’으로 돌아간다. 당시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문애리 교수와 나는 홈리스 고양이들 때문에 얽힌 사이이었던 것이다!

UCLA 사회학과 교수님과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인 나는 개인적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었고,  각각 다른 곳에서 고양이들을 rescue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가끔 신문기사를 통해서 상대방을 인지하고 있는 정도이었다. 우리는 고양이구제 사업을 하다가 밸리에 있는 성요셉 성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성요셉 성당 마당에는 지금의 성당 재건축 전에, 여러 선데이 스쿨 트레일러가 있었는데  ‘밸리 출신’의 홈리스 고양이들이 트레일러 밑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홈디포의 까만 고양이, 성당안의 다섯마리 새끼를 낳은 어미고양이는 내가 입양했고, 까만 고양이는 몇 년을 내 집에서 살다가 삼 년 전에 죽었다.

SATII Korean을 College Board 에 상정하기 위한 petition drive에 참여했던 엘에이 주민들, 교민사회의 리더들, 한국기업의 재정적인 도움 (예: 삼성)으로  SATII Korean 이 College Board 에 의해 1994년 채택되었다. 당시의 열정은  AP Korean 을 위해 이어지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비영리단체 ‘한국어진흥재단’ 이다.  홈리스 고양이 구출작업에 시간을 쓰고 있던 당시 문애리 교수는  ‘한국어진흥재단’의 이사장이었고, 그는 나를 이사회로 이끌었다.

‘한국어진흥재단(이하 재단)’은 미 주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인 이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단의 활동은 주말학교의 그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주말학교는 우리 한국인의 혈통 자녀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시스템으로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한국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출판된 교과서로 배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재단’의 활동은 비혈통, 혈통 자녀들을 타겟으로 한다. 정규학교에 Spanish, French, Chinese, Japanese 등과 동등하게 class를 넣어, 한국어를 외국어로 채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활동에 관여된 여러개의 사업은 필수적인 것으로 비혈통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 만드는 일 이외에도, 한국어교사양성, 한국어교사시험준비등이 그 예로 ‘재단’은 공식적으로 9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교육부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교육원이 대행하고, 지원받는 funding의 밸런스는 언제나 ‘zero (0)’ 로  한 해를 마감한다. 사업에 쓸 만큼만 신청하기 때문에 밸런스가 zero 인 것은 당연하다. 이사들은 무료봉사를 하고, 약 20명이 있다.

뒤돌아 보니, 나는 실상 의학과 때 문교부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다. merit base 로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연결되었던 문교부.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연결된 문교부, 모국을 떠난 새로운 내 나라에서 모국의 언어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본다. 2년 전 내가 이사장이 되었고, 작년 한글날에 ‘재단’은 그 업적을 한국정부에서 인정받아 대통령상을 한글날에 받았다.

그리고 나는 한글로 미주 중알일보 ‘오픈 업’이라는 컬럼에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한글, 문교부, ‘한국어진흥재단’, ‘재단’ 이사장직, 올해  한글날에 있을 25주년 기념 갈라, 25주년 기념 책자발행, 한식세계화협회와의 동업으로 효율적인 한국문화와 한글의 진흥.

없었던 모국에 대한 애국심을 싹 틔우고 있는 활동에 여념 없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아침이다.

특별했던 행사: 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 에 부치다 (사진참조)

한국혈통의 미국교민들에게 5월은 특별한 달이다. 모국의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머니날, 5월 15일 스승의 날 뿐 아니라 지금의 내나라가 된 미국의 5월 한달이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의 달 ( 이하: 아태문화유산의 달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이기 때문이다. 1896년 미국대륙횡단 기차길이 중국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5월에 완성 되었고, 1943년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처음 디딘 달이 5월이어서 미국은 1978년에 5월을 동양문화 유산의 달로 선포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 5월 11일 그라나다 힐스 공립 도서관에서 한국혈통을 가진 어린이들과 한국태생 일세, 1.5세 이민자들이 한국 전통음악과 무용으로 아태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5세 부터 70세에 이르는 유희자 전통 음악 무용학원 학생들 24명은 부채춤으로 시작해서 가야금, 양금, 아쟁 세가지의 현악기와 하나북, 난타북, 장고, 징, 굉가리등 5가지 종류의 타악기를 써서 자진모리, 농악, 꼭두각시, 휘모리, 가야금산조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사물놀이 협연을 마지막으로 음악회를 마쳤다.

다섯살 짜리 두명의 각시들은 색동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여섯살 자리 꼭두는 신랑맵시를 하고 꼭두각시 춤을 추어 관객을 사로 잡았다. 또 자패증을 앓고 있는 쌔미 김 아동은 장고 를 즐겁게 치면서 음악으로 치유의 길 찾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서양곡과 찬송가를 가야금으로, 한국전통 악기들로 협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You raised me up!’ 을 가냘프게, 때로는 힘차게 가야금이 튕겨주었고, 가야금, 양금, 아쟁, 장고가 ‘Amazing Grace’를 연주하여 우리들의 속죄와 감사함을 높으신 분에게 올려드렸다. 쟌 뉴톤은 아마도 그의 하느님으로 향한 시(詩)가 한국 전통악기로 연주되리라는 것을 18세기에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참으로 특별하고 훌륭한 음악회이었다.

잊고 살았다!

분주하다는 핑게로 한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서류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글들, 일기를 쓴 책들을 구분해서 치우다가 40년 하고도 한 달 전인 1979년 3월 29일, 낮에 썼던 일기를 보았다. 수련과정 마지막 해로 병리학 교실에 순환근무를 갔던 때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양방사선학 수련의 과정을 뉴욕주립대학 업스테이트 과학센터에서 받았다. 수련의들은 본인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또 다른 특수 전문과에 순환근무를 하므로서 본인의 전문성의 판도를 넓히고 심도 깊은 의학을 연수해 간다. 나의 전문직에는병리학, 진단방사선학, 종양내과학, 종양외과학이 필수적인 로테이션이다.

일기 이야기를 조금 하고 지나간다. 나는 의과대학 시절 부터 일기를 가끔씩 써 왔다. 일기를 아무 때나 쓴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번 끼적인 경우도 있다. 매일 쓰지도 않는다. 되 돌아가 읽는 적은 드물다. 언젠가 쌓여 있는 일기책들을 모두 소각하리라 마음 먹고 있다.

이 40 여년 전에 쓴 일기는 반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큰 딸에게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큰 딸은 세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젊은 엄마,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 안타까와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시대적 우울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쓰면서 엄마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가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시시껄렁한 미국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미국사람들이란 백인 남자 의사들을 칭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는 이 일기를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일기장 노트의 공간에 인종차별에 대한 내 마음을 끄적였던 1979년 보다 일 년 전인 1978년에 다민족 사회의 미국은 5월 첫 열흘을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이하 아태문화유산)의 날’로 정했다. 5월은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처음 디딘 달(1943년)이고, 중국인들의 노고로 미국대륙횡단 기차길이 완성된 달(1896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4년 후인 1992년 상원은 열흘이 아닌 5월 한 달 동안으로 늘렸다.

미국의 인권운동이 있었던 1960년 대 이전에는 동양인을 ‘오리엔털’이라 불렀다. 이 단어는 약간 모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가에서 중국, 필리핀, 일본계 학생들의 끈임없는 투쟁과 하와이 상원의원이었던 일본계 팻지 밍크, 미시간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중국계 청년 빈센트 친 인종오해-살인사건등이 ‘아태문화 유산의 달’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보아도 된다.

빈센트 친은 자동차업조계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양아들에 의해 살해된 청년이다. 당시 일본산 작은 자동차들의 수입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는 경제적 타격을 크게 받았다. 빈센트를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증오감에서 저지른 살인범죄였다. 감옥형이 아닌 3천불의 벌금과 집행유예로 가볍게 처리된 이 사건을 ‘삼천불 짜리 살인 면허’라고 할 정도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1860년에 미국 인구의 0.1%였던 아태계는 15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겨우 4.8%를 차지하고 있다. 40대 중반이 된 큰 딸은 나 처럼 종양방사선 전문의가 되었고, 교육에 관심을 둔 박사인 둘째 딸은 미국공립중고교 내의 기기(器機)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화내지 않고 시간은 걸리지만 실력을 쌓고 내공을 기르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동굴교회’와 ‘쓰레기 마을’ (II)

교회를 돌아보고 있는 나에게 한 남자 노인이 접근해 왔다. 무척 친절했다. 교회에 관한 얇은 책자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노인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약간의 영어를 하던 그 노인은 처음에는 20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야박하지만 5불로 낙찰을 했다. 내 마음에는 책자를 보지 않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더 줄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하다.

돈을 주고 받은 책자에는 동굴이 생긴 기적과 기적을 일으켰다는 콥틱기독교의 성인, 외눈박이 성 시몬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성 시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며 살다가 자신의 눈 하나를 빼어 버렸던 사람이라고 한다. 봐서는 안 될 무엇을 보았길래 성 시몬은 한 눈을 빼어 버렸을까.

이 동굴이 생겨난 기적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콥틱 기독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예수님의 제자 마르코가 서기 42년에 세웠다. 이집트가 모슬렘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면서 기독교인들에 가해지는 박해는 심해졌다. 서기 10세기에 카이로 파티마(Fatima) 왕조의 칼리프 알 무이즈 (Caliph al-Muizz)는 각 종교 수장들을 초대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종교적인 디베이트를 하게 하곤 하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당시 유대인 대표가 기독교인들의 대표 알렉산드리아의 62번째 교황 아브라함을 골탕먹이고 크리스챤을 박해할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의 간교로 칼리프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마태오 복음 17:20을 인용하면서 모카탄 산을 움직여 보라고 명령했다. 만약 산을 움직일 수 없으면 모든 기독교인들을 순교 시켜야 한다는 충언과 함께.

아브라함교황은 ‘매달려있는 교회(Hanging Church)’ 라고 불리우는 교회로 사제들, 부제들과 교회원로들을 불러 함께 사흘을 단식하며 기도하였고 이때 일반교인들도 합세 하였다 한다. 이 교회는 바빌론 성곽에 있는 관리실 위에 교회의 중심부가 얹혀진 형태로 지어진 교회이어서 ‘매달려있는 교회’라고 불리운다. 지금도 있는 오래된 교회이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그는 환시를 보았다. 성모님이 발현하시어 그에게 저잣거리로 가서 외눈박이 무등쟁이(구두만드는 가죽을 다루는 사람) 시몬을 만나면 그가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시몬은 아브라함 기독교 교황에게 칼리프와 칼리프의 군대, 사제들, 시민들 모두를 산 앞으로 집합하라 일렀다. 그들 앞에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를 세번 외치면서 산을 향해 십자를 그으라고 알려 주었다 한다. 실로 기적이 산을 가르었고 갈라진 산 사이에 거대한 동굴이 생긴 것이다. 기적이 일어 난 직후, 뒤 돌아 보니 이미 외눈박이 성 시몬은 보이지 않았다.

외눈박이 무등쟁이는 콥틱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성유물이 1991년 카이로 ‘성스러운 성모의 콥틱 동방교회’라고 불리우는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교회를 수리하던 중, 성당 지하 겨우 1미터 밖에 안되는 깊이에 성유물이 뭍혀 있었다고 한다.

기적을 보아야 믿는 우리들을 경고하신 예수님이시지만, 기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기적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시었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눈에 띄일 수도 있고 비밀스러울 수도 있는, 공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기적의 연속이라는 것을 ‘동굴교회’와 묵언의 간증으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쓰레기 마을’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확인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말일까?

2월의 여행은 나 같은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얍삽한 나의 인식과 달리,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보게 했다. 이는 나날의 기적, 기적을 초대하는 기도와 침묵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경고한다. 바쁘고 분주하고 번쩍이고 기름진 현대 생활은 아무리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미디어 섹션에 있습니다.

크리스챤위클리에 실린 글입니다. 2019.5

 

‘동굴교회’와 ‘쓰레기 마을’ (I) : 이집트를 다녀와서 (사진참조)

‘동굴교회’는 카이로 모카탐(Mokattam) 산 절벽 쪽에 있는 동굴안의 교회들을 말한다. 모두 7개가 있다. 그중 제일 큰 교회는 깍여진 절벽 밑으로 형성 된 거대한 동굴 공간 안에 있는데 2만 명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곳이다. 이 교회들은 이집트 카이로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집단이 만든 공동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동굴교회’를 가려면 쓰레기 수것군의 집단, 제벨린 (Zabbaleen)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쓰레기 마을’을 지나야 했다. 말 그대로 쓰레기 마을이었다. 카이로에는 최근 까지 쓰레기 수거를 정부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료로 전역 가정집들에서 쓰레기를 수거해다가 다시 활용 할 수 있는 물건들을 추려서 수리한 후, 이것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자급자족의 집단이다. 또 쓰레기 중 사람들의 오물을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의 먹이로 써왔다. 약 2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했다. 말 대로, 쓰레기가 길 양 옆에 쌓여 있는 좁은 중앙 통로 길을 지나야 했다. 더러웠다. 악취가 불쾌했다. 곳곳에 쓰레기 마차를 끄는 당나귀들, 우리들이 똥차라고 부를 정도의 고물 소형 트럭들이 있었다. 어떤 당나귀들은 제 몸체보다 더 많은 접은 카드보드를 등에 업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마차군들은 대부분이 청년들인 것이 희안하게 보였다.

길이 좁아 대형 버스에서 작은 버스로 갈아 타고 이 마을을 지나 동굴교회에 도착했다.

제벨린들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 지나가고 싶다. 이들은 상(上) 이집트에서 살던 농민들로 1940년 기근으로 인해 집단이동을 했어야 했다. 상 이집트란 아스완 문화와 왕국이 있었던 남쪽 이집트를 말하고 하 이집트란 지중해 가까운 지역 즉 북쪽 이집트를 가르킨다. 우선 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죽음의 지역, 즉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 나일강 서쪽 기자(Giza)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핑크스, 피라미드들이 있다. 파라오들이 생전에 자신이 묻힐 무덤을 만들었던 곳이다.

1970년 갑작스런 기자 행정부의 출퇴명령으로 사흘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던 그들은 모카탐이라 불리는 산 옆구리 지역이었다. 실상 그들에게는 농사를 짓는 것 보다, 쓰레기를 모아서 재활용품을 찾아내고, 수리해서 파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도움이 되었다한다. 당시 이집트에는 개인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정부의 체재가 없었다.

이 제밸린들의 대(代)를 물리는 빈곤한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보니 건강 유지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보면 좀 오래 된 통계이긴 하지만 1990년-1995년 사이에 신생아 사망률이 카이로 일반 시민들의 그것보다 세배가 높았다고 한다. (1000 명에 45.6명 vs 117명).

이들의 특징은 90%가 콥틱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는 조건으로 이곳으로 쫓겨오고, 대대로 쓰레기를 주워다가 재활용하면서 살아온 그들이지만 모슬렘 정부의 핍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하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기에 빈곤을 받아들이고, 비록 잘 살수 있는 환경으로 발전한 경우에도 이 쓰레기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길을 지나가며 본 얼굴들은 나에게는 무표정으로 보였지만, 불평의 얼굴 표정은 아니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교회 공동체가 이루워진 것이 1975년다. 한 해 후 교회가 화제로 피해를 보게 되면서 동굴안에 새교회들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들이 세운 동굴안에 있는 교회들이 보여 주는 믿음은 고통의 신비를 새삼 생각해 보게 하고 방문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또 동굴의 거대함은 전능하신 분의 자비로운신 허락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한다.

크리스챤위클리 2019. 5

사진은 미디어 섹션에서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