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잠자는 풍화암

몇 겁의 만 년 동안

그대를 지키었다네,

지구라는 행성의 심수(深水)에서.

아~ 수많은 용트림이 바닷가로 떠밀고

메마른 수렛길로 옮겨진 이 몸, 그대 지키기를 알지 못하네.

For tens of thousands of years through countless ages

From the deep waters of Earth, hundreds of millions of surging of the vomits

Brought me to kiss the sands of the shore

Who pulled me to a dry cart track?

Lost soul, lost breaths, lost life.

AI Venture Times 2026.6.18

[디카시 산책] 여명 Dusk

누구에게나 쉼터가 있으리라 믿고 싶은

여명의 시간

태양도 달도 모습을 숨긴 채

어둠과 빛으로 다가온다.

침묵의 소리도 있으리라 믿고 싶은 여명의 시간.

A time I long to believe  

The existence of shelter for everyone

The light from the hidden sun and moon toward us at dusk.

A time I long to hear

Sound of silence.

[디카시 산책] AI Adventure Times 2026.9.23

두 엄마와 여름

여름은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내 삶터 미국으로 나의 모국 한국과 엄마를 모셔 온다. 로스앤젤레스 여름의 열기는 엄마 냄새를 실어 나르고 있다. 엄마를 코로 만나고, 가슴으로 알아뵌다. 한 엄마가 아니라, 두 엄마이다.

삼팔따라지 평안북도 출신인 한 엄마는 평생을 디아스포라로 사셨다. 올해로 한국이 일제 강점기를 벗어 난지 82년째이고, 6·25동란이 있은 지 77년째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 앳된 처녀이었던 그 엄마는 평안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평안도로, 평안도에서 다시 서울로 이동했어야 했다. 엄마는 조상이 묻히어 있는 고향과 친척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랬던 그녀에게, 서울은 제2의 고향이 되지 못하였다.

자식들이 하나씩 둘씩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다시 이산가족이 된 우리 집안, 특히 엄마에게,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었다. 다시금 그녀는 1960년대에, 평안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이산가족의 삶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기로 하고, 미국이라는 넓디넓은 큰 나라에서 자식들과 함께하고자 다시 한번 이동한다.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받아들이었다. 한국 땅에서의 디아스포라의 삶과는 무척 다른 이방인이 넘어야 할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장벽을 허물지는 못하였지만, 이역(異域) 땅에서,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잘 사시다가, 세상과 영원히 하직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하신 그곳은 이념 같은 것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거기에도 여러 종류의 언어가 있으려나 궁금하다.

다른 한 엄마는 세상이 두 클래스로 구분되어 있다는 각인된 동아줄을 끊지 못하셨다. 세상은 두 개의 길만이 있고, 그중에 고등교육을 받은 혈통이 제반 문제의 해결사가 되고, 다른 그룹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으시었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으면, 그 고등교육 양반 그룹이 방패막이 된다고 생각하던 분이었다. 그녀에게 전능하신 분, 하느님은 없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도, 피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파도는 양반에 의한 파도가 아니었기에, 피하지 않아도 되고 설사 파도가 쳐오더라도 양반이 물리치어 준다고 믿었다. 그 방패막이 모래성이었음을 여인은 알지 못했던가. 디아스포라 미국인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진 그녀가 세상에 데리고 나온 첫 생명줄을 따라서 나설 수는 없었다. 애초에, 영원한 이별이라 가슴에 담고, 태평양 넘어 동쪽을 바라보며 해바라기로 사시었다.

이 두 엄마는 당신들 나름대로 딸인 나를, 사위인 내 남편을, 며느리인 나를, 며느리의 남편이 된 아들을 아끼었다. ‘사랑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던 두 여인은 한 여아(女兒)와 한 남아(男兒)를 가슴에 품었다.

여름이 오면, 두 여인의 냄새를 맡는다.

한 여인은 모시 적삼 앞 틈새로 시큼털털한 땀내를 캘리포니아 사막의 여름 바람에 태워서 나들이 보내온다. 세상의 모든 불편함과 허물이 마치 당신 것인 양 치마폭에 감싸 안은 다른 한 여인은 모시 치마에 먹일 풀을 다시 쑤고, 그 풀 향기를 보내온다. 몇 세대를 물려받은 저울질할 수 없는 외로움을 풀 먹인 치마폭에 싸 안을 것이다.

여름이 왔다. 한 엄마의 열무김치를 만들어 보자. 슴슴한 열무김치 국물에 얼음을 띄우고, 새하얀 가는 국수를 말아서 훌훌 먹어보자. 다른 한 엄마의 얼갈이 열무김치도 흉내 내어보자. 풋고추 썰어 넣고 자박자박 버무려 만든 열무 풋배추 김치를 방금 지어낸 흰밥에 얹어 먹어보자. 노란 참외의 옷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게 하자. 쓰다 놓고 간 나이 먹은 푸른 무늬 큰 접시에 올리어 주자. 쩍 소리 내고 자신을 내쳐버린 수박의 새빨간 붉은 가슴을 늙은 싸리나무 소쿠리에 앉혀주자.

얼갈이 열무김치, 열무 풋배추 김치를 만드는 실습이 끝나고 맛이 들 때쯤에 손주들을 보러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열무를 몇 단 사서 가방에 넣어 부칠까, 싶기도 하다. 그 애들이 사는 곳에 열무는 없을 것이다. 먹는 것에 집착하지 말 것과, 반찬 투정은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내가, 꼰대 나이가 되니 먹거리를 가리고 있다. 좀 어울리지 않는다.

요리는 화학실에서 하던 실험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나에게는 하나의 실험이다. 맛으로 성공과 실패를 따지자면 성공률은 50%이다. 실험이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더 흥미롭다. 손주들이 보는 데서 할 열무김치 실험은 무모할지 모른다. 나의 가늠할 수 없는 열무김치 실험 성공도(成功度)와 세대를 거른 한국 음식에 대한 불확실한 기대치가 큰 변수이기 때문이다. 손주들은 혼혈(混血)이고, 나의 열무김치의 맛은 혼미(混味) 또는 합미(合味)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맛의 하모니 보다는 맛과 맛이 서로 경계를 넘어 주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모셔 온 엄마, 엄마의 열무김치가 여름의 열기를 날려주면 좋겠다.

미주 중앙일보 [문예마당] 2026.9.18

폴 게티 미술관 단상(斷想)

내가 봉사하고 있는 한국어 진흥재단의 미래 사업 건으로 모국의 관료 한 분과 디아스포라 차세대들의 교육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다른 관료를 만났다. 

행사에 참석하기 전 우리는 J. 폴 게티 전시관을 구경하기 위해 한인타운과 공항 중간지점인 브렌트우드에 있는 폴 게티 센터에서 만났다. 29년 전, 1997년에 개관된 게티 센터에서는 맑은 날 카탈리나섬, 태평양, UCLA, 다운타운 등을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조경이 완벽하다. 

J. 폴 게티 미술관, 게티 연구소, 게티 보존연구소와 게티 재단 등이 센터 안에 있다. 재단은 집안의 부(富)를 사회 전반, 특히 교육, 문화, 예술 진흥을 위해 재투자한다. 약 1,400명이 J. 폴 게티 트러스트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985년 이후  50개국 이상, 약 1,300명이 ‘게티 장학금’ 대상자로 선발돼 장학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장학금 수혜자들은 현재 재료과학, 화학 분야 등에서 20명 이상이 연구자나 전문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세대와 차세대를 위해 체계적으로 장기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전시관 본관은 주차장에서 전기 트램을 타고 가거나, 등산하는 식으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휘발유 배출 물질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차장까지만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출입이 허용된다. 방문객들은 전력을 이용한 트램을 타고 주차장에서 본관까지 왕래한다. 

폴 게티 뮤지엄에는 유화, 판화, 조각, 사진 등의 다양한 소장품이 있다. 마침 특선으로 빈센트 반 고흐, 세잔느 등 인상파 낭만주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테오도르 제리코 (1791~1824) 의 모델 습작이 벽에 걸려 있었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33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의 완성된 작품이나 습작 중에는 흑인 노예의 상체 그림이 많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이어, 1800년대 초에 살았던 그는,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 계급제도의 비참함, 빈곤, 죽음, 사회 정의의 부재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속의 흑인들은 비애, 고통, 연민의 눈으로 그림을 대하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초라했지만 그림 속 노예들은 숭고한 모습이었다.

모델 습작은 그의 다른 그림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대작 ‘메두사 뗏목’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그림들을 이해하려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프랑스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전에 잃었던 식민지를 재정리 중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아프리카 서해에 있는 세네갈을 향해 떠났던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400명 중에 구명보트를 타지 못한 150명이 뗏목에 버려지고, 12일간 바다에서 표류한 끝에 15명이 구조되었고, 그중 최종적으로 5명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그림으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그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림에 나타난 한 흑인 남성의 얼굴, 남루한 구멍 난 재킷 등은 보는 이들의 눈이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하도록 하는 무엇인가 슬픔이 담긴 듯했다. 검은 피부의 눈매를 가진 그는 삶의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는 하류층 노예이었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게티 센터는 이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센터를 돌아 나오면서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던 스메타나의 ‘몰다우’는 그 자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르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지배당하던 체코슬로바키아, 한국, 아프리카 식민지, 노예 등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는 이날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되뇐다. 나는 행복해야 하고 그 행복함을 정당화하는 축복에 감사하고 또 이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2026.8.18 울산광역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