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획-동남아 여행기(4)> 콰이강의 나라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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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4-06 [18:20]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이번 동남아 여행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작해서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거쳐 타일랜드 방콕에서 끝났다. 타일랜드가 동남아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의 식민지 화염을 피한 나라라고 세계 역사 시간에 배웠을 때,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한국은 같은 시대 왜 일본 제국주의 확장의 시퍼런 칼날 아래에서 처참한 희생을 당하고 있었을까. 태국은 운이 좋았다기보다 유럽의 무역 거래상들에게 먼저 투자의 문을 열었고, 비즈니스 협상을 하면서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의 자원을 빼앗고자 하는 계획이 성숙해지기 전에 먼저 현명한 처리를 한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의 지혜와 역량이 존경스러웠다.

이번 여행에서 또 알게 된 사실은 세계에서 쿠데타가 가장 많았던 나라 중 하나가 태국이라는 점이었다. 태국의 치앵마이 대학 폴 체임버스 교수에 의하면, 1932년 혁명 이후, 약 30번에 가까운 쿠데타와 17번 정도의 개헌이 있었다고 한다. 성공하기도 하였고, 실패한 적도 있었는데 이 교수의 의견에 많은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는 반정부 시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 국왕 부부의 사진이 들어간 빌보드 (사진=류 모니카 제공)


1932년 혁명 때,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었는데 여러 쿠데타 중에도 왕실은 지켰다고 한다. 길거리 곳곳에서 현 국왕 부부의 사진이 들어간 빌보드를 볼 수 있다(사진 참고). 국왕에게 불미스러운 발언을 하면 불경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21세기에 아직도 국왕 불경죄로 처벌을 받는다니 아이러니할 뿐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대도시 중심가처럼, 태국 수도 방콕은 번잡했다. 교통체증이 심했다. 승용차, 오토바이, 툭툭이라는 휘발유로 움직이는 이 나라 특유의 신식 인력거가 거리를 메운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데, 이곳에도 중국인들은 그들의 타운을 만들었다. 방콕의 차이나타운은 삼팽 지역 차이나타운이 유명하다. 한문으로 된 간판이 가게 대부분에 붙어 있다. 한자는 눈에 익고, 이해할 수 있어서 편했다. 개발도상국 당시에 한국이 그랬듯이, 이곳에는 정찰제가 없다. 부르는 게 값이다. 물건값을 부풀려 부르기 때문에 무조건 반절 정도 깍은 뒤 흥정해야 한다고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다.

필자가 세계 역사를 배울 즈음에 `콰이강의 다리`, `007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라는 영화와 `왕과 나`라는 뮤지컬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모두 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콰이강의 다리는 1962년쯤 한국에서 처음 개봉됐다. 일본의 남방작전…콰이강과 강을 안고 있는 두 계곡…두 뭍을 잇는 다리…다리를 만들고 철도를 깔아야 하는 영국인 전쟁 포로들…뙤약볕…노역…. 태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한 영화가, 어린 우리들을  감동케 했었다. 우리 조상들이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그들이 겪은 후유증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될 당시 한국은 반일 사상이 팽배했던 때이어서 더욱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일본의 남방작전을 통해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궁극적 목적지 인도에 도착하기 위해 병력과 고무, 석유 같은 보급품을 인도 근방 버마 (현재 미얀마) 북쪽까지 날라야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약 400킬로미터에 걸쳐 철도를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약 6만명의 전쟁포로와 일반인들을 부역시키었다. 그 과정에서 약 1만3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콰이강은 기차 노선의 동쪽 땅에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데,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전, 방콕 근처에서 방향을 급격히 튼다. 기차가 이 지점을 통과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 포로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했다. 그 비참한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가가 썼다. 그는 인도차이나 고무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인데 자유 프랑스 의용군으로 싱가포르, 미얀마, 중국 쿤밍, 인도에서 근무하다가 2년 동안 일본군 포로로 잡혀 살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 상을 모두 휩쓸었던 `왕과 나`라는 영화와 뮤지컬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태국에서는 출판 금지이고, 뮤지컬이나 영화 상영도 역시 금지되어 있다.  

어렸을 때 영화를 통해 연결됐던 태국과의 인연은 뉴욕주에서 공부를 마친 후 엘에이에 정착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태국 출신 암 환자들은 필자가 한국 사람이어서 좋다고 했다. 동양인이라는 공통 분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국산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선사하거나, 닭고기를 찹쌀과 바나나 껍질에 싸서 쪄서 만든 태국산 만두를 건네곤 했다. 나는 그들의 음식에 매료되었다. 쌀로 만든 국수를 코코넛 주스와 카레에 비벼 만든 파타이, 이란식으로 카레를 섞고 변형해서 만든 마싸만 카레 접시가 맛있었다. 

아름답고, 푸르고, 귀해서 보관함에 다시 넣어두고 싶은 기억들이다. 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 태국 여행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먼 거리라는 단점과 습하고 무더운 기후라는 악조건들을 뛰어넘게 했다. 다녀오기를 잘했다. 태국은 나에게 인연이 깊다면 깊은 나라이다.

<해외기획-기행문(3)> 동양의 용(龍) 싱가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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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30 [17:19]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에 이어 싱가포르 여행에 나섰다. 치과 의사인 조카가 10여 년 전에 중국계 싱가포르 청년을 만나서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조카사위 부모님들은 오래전 젊으셨을 때 싱가포르로 이주해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2세를 교육한 중국계다.  

싱가포르 인구의 약 75%가 중국계이고 9% 정도가 인근 인도 출신들이다. 한국 면적의 약 3%밖에 안 될 정도로 작고, 천연자원도 거의 없다. 63개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인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인접 국가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차대전 이전 3년 동안은 일본이 점령했다. 이후 말레이시아와 합병됐다가 한국보다 좀 늦은 1959년에 독립했고, 공식 독립선언은 1965년이다. 지금은 세계 정보통신 산업과 금융시장, 글로벌 사업체의 허브이고, 국제회의, 국제 전시회 장소로도 선호되고 있다. 세계적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관광청 통계에 의하면 2022년 한 해 동안 630만명의 외국인이 방문했고 143억 달러 수입을 창출했다고 한다. 앞서 방문했던 인도네시아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 바다사자 조각상 (사진=모니카 류 제공)

우리는 제일 먼저 마리나 해변부터 찾았다. 이곳 초입에 그들의 마스코트 ‘바다사자’ 석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몸체는 물고기이고, 얼굴과 상체는 사자다. 사자의 벌린 큰 입에서 물이 작은 폭포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근방 산책로에는 하늘을 향해 펼쳐진 흰 연꽃 모습의 예술 과학 박물관과 버섯을 펼쳐 놓은 모양의 ‘수퍼트리’라고 불리는 18개의 인공 수직 나무가 서 있다. 그중 두 개의 수퍼트리 꼭대기를 연결해서 만든 산책로를 걷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땅에서도 보였다. 이 수퍼트리에는 총 22만6천개의 나무가 심어지어 있고, 관개수로(灌漑水路) 역할을 한다고 한다.  

▲ 하늘의 정원 전망대 (사진^모니카 류 제공)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3개의 카시노 호텔 타우어가 운하 저수지 건너편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배 모양으로 조형된 ‘하늘의 정원’ 전망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무려 3에이커(약 3,672평)의 면적으로 그야말로 하늘의 정원이어서 방문객들이 산책도 하고, 수영도 하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를 먹을 수도 있다. 이 높은 곳, 하늘 가까이에서 땅 위의 인위적 문화 공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니 놀랍다. 그런데 주인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샌즈라고 한다. 몇 년 후에는 네 번째 타워를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하버드 대학의 동아시아 전문 교수이었던 에즈라 보겔은 30년 전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이라는 용어를 썼다.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와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다. 그는 한국보다 중국과 일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나 한국과 싱가폴의 발전상을 생각하면 그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싱가포르. 한때 초라하고 가난했던 어촌이 지금은 세계 IT와 무역센터를 품고 있다. 초대 총리이었던 중국계 리관류(1923~2015)의 공로라고 한다. 한국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더위를 참으며 열심히 일하던 그때, 그는 연평균 섭씨 25도에서 31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기후 때문에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마음껏 쓸수 있는 정책을 썼다. 그래서 싱가포르 경제 성장의 큰 역할을 에어컨이 했다는 뒷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되지만, 그가 원했기 때문에 그의 동상은 싱가포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양인들이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과 달리 아시안들은 정직하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정부를 원한다’(1992)고 말했던 그가 지금의 싱가포르 기반을 깔아 놓은 셈이다. 

<해외기획-인도네시아 기행문(2)> 주식과 채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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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26 [17:45]

▲ 삼푸콩 사원 (사진=류 모니카 제공)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사마랑에 들렸다. 여기에는 삼푸콩(三保洞) 이라 불리는 중국 사원(사진=삼푸콩 사원)이 있다. 약 9, 800평 부지에 자그마한 여러사원들과 함께 있다. 그중 제일 웅장하고, 오래된 사원이라고 한다.

 넓은 마당에는 14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명나라의 쟁해 장군의 석상(사진=쟁해 장군 석상)이 서있다. 장군이 이 사원 근방의  작은 동굴에서 기도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개인 소유이었는데, 지금은 중국 출신 사람들과 여러 다른 인종들의 문화 행사가 열리는  비영리 단체 소속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호랑이 탈춤 공연을 하고 있었다.

▲ 쟁해 장군 석상 (사진=류 모니카 제공)     ©울산광역매일

혼혈이 많은 인도네시아에는 여러 인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중 중국계는 1.2%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침투력은 매우 강하다. 인도네시아 어디를 가든 웬만한 도시에는 모두 차이나 타운이 있고, 중국 사원, 음식점 등이 있다. 활발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인종의 섞임이 보편화된 것 이외에도 6개 종교의 어우러짐이 특이하다. 87%가 무슬람 교인이고, 기독교인이 약 10%이다. 힌두교, 불교, 유교는 극소수다.  하지만 종교인들 간의 반목이 없다. 오히려 전례 예식은 서로 약간씩 섞인 퓨전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번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또 하나 배운 게 있다. 유럽 국가들이 동남 아시아와 동양에 침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향료 수출입 무역을 하던 일반 무역상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7세기에 네델란드 출신 사업자가 만든 동(東)인도회사가 좋은 예이다. 나중에 부도를 내어서 망하기는 했지만 이 회사는 인류 최초로 주식과 증권의 개념을 도입해 설립됐다. 결국 서양인들만의 주식·증권 투자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속에서부터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갔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를 정치적으로 점령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들은 노예제도를 자연스레 만들고, 아편을 제공해 그들의 자립 능력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들을 강압했다. 그리고 이 비운의 민족은 이차대전 중 3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 인도네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의식’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잠시 나라를 흔들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근대사는 한국의 근대사와 정치적인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열지 못했기에 서양 문물에 어두웠고, 무역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도 국제 무역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 흥덕왕 때 (서기 820~840년 대) 활동하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장보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문서화했는데 장보고는 해적을 토벌했고, 신라의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골품제도(骨品制度)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무역상이었던 셈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한국은 많은 장애물을 넘어 지금은 세계가 우러러 보는 IT 강국이 됐다. 혼자 뛰어야 했던 장보고 청해진 대사와 달리 똑똑한 차세대들이 지구촌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1948년 독립 이후 개발 발전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행 중 길을 지나다 보면 간혹 한국의 기업 광고가 눈에 뜨이고, 웃고 있는 멋진 한국 배우들의 얼굴도 보였다. 두 나라가 모두 역경을 거쳤지만 한쪽은 성공한 반면 다른 한쪽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개인이나 사회처럼 국가도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제대로 올라 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린다. 

<해외기획-인도네시아 기행문(1)> 이름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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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17 [17:31]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된 것은 가난했던 집안의 기둥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그러나 멋지게 살았던 큰오빠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반세기 전 오빠는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했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가 살았던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보는 것이 나의 숙원이었다. 

오빠는 왜 인도네시아에 살게 되었을까. 사무엘 김이라는 뉴욕 타임즈 기자는 1973년 3월 19일 이런 기사를 썼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경제 성장의 기반을 어느 정도 이룩한 한국이 경제개발이 절실한 인도네시아를 돕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열대 산림에서 자란 틱크나 마호가니 원목을 수입하고, 동시에 그 나라의 건설산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성세대는 50여년 전 인도네시아 나무로 만든 보르네오 가구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또 삼환기업 같은 건축회사가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는 사실도기억할 것이다. 큰오빠도 당시 인도네시아 건설사업에 참여했었다.  

로스안젤레스를 떠나 하루 이상을 길 위에서, 또 하늘에서 보내고 드디어 인도네시아 발리에 도착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1만7천 개 섬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는 미국 텍사스주의 세 배 면적으로 2억 3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700여개의 언어와 6개의 종교가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종교, 인종들이 모여서 살지만 마찰 없이 어우러져 잘살고 있다. 다인종 국가에 살고 있는 필자로서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인도네시아는 1800년부터 네델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906년 발리 왕국을 중심으로 네델란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관총과 대포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네델란드 군이 궁성 앞에 도달하자 왁과 발리인 약 1천명이 항복보다 죽음을 택했다. 발리 왕국은 몰려오는 네델란드 군을 향해 저항의 의미로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는 이 사건을 ‘푸푸탄’투쟁이라고 한다.

우리가 삼일 만세 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듯이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네델란드 통치시절부터 여러 번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다시 돌아온 네델란드에 대해 다시 독립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세 운동 당시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견지한 반면 그들은 직접 자신들의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대비된다. 

▲ 발리에 있는 푸푸탄 바둥 기념탑     ©울산광역매일

사진의 ‘푸푸탄 바둥’ 기념탑에는 봉기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조각돼 있다. 어린아이들도 봉기 때, 어른들과 함께 푸푸탄을 했다는 뜻이다. 이 기념탑은 푸푸탄이 제일 많았던 광장에 세워져 있어 의미를 더한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 공원으로 달려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희생된 조국의 수많은 조상들이 생각났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때 식민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과 인도네시아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없는 애국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양쪽 나라에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또 한국이 그랬듯이 그들도 성장통을 겪어오고 있지만, 그들은 지금부터 20년 후인 2045년이 되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수필]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이 있거나,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다. 또 충동적으로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이었을까? 나는 늘 허기가 지었던 것 같다. 육이오 전쟁 중에, 그리고 그 후에 한국의 모든 국민이 힘들고 가난했던 때에도 우리 식구들은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집이 부유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쪼들리는 살림 중에도 엄마의 지혜로운 가정 행정의 운영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에는 배고파 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배가 고팠다. 집을 떠났을 때부터이었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형체를 구별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촌스러울지언정 단순하고 상큼했던 엄마의 밥상을 텅 빈 벌판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회오리바람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갔던가.

인턴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났다. 오 십여 년 전 한국의 인턴들은 당직 숙소에 기거해야 했다. 하루 건너서 당직이므로, 당직을 선 시간과 낮 근무까지 합쳐서 24시간 일하고, 그 다음 날 정규 일과를 계속해야 했던 때라 인턴 숙소에서 일 년간 살았다면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인권, 노동법, 의료 수련의 법 위반이라 그리하지 못한다. 어떻든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을 가끔 방문하던 손님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나를 안아주실 때 풍기던 익숙하고 따뜻한 체취, 반찬 냄새가 배어있는 엄마의 남루한 옷자락이 엄마가 끓이신 된장찌개와 풋김치가 올려진 단순하고 가난했던 밥상과 함께 멀어져 갔다. 엄마의 가슴과 나 사이에 있던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의 구름다리 밑에도 그녀의 남루한 옷, 가난했던 밥상, 신선한 풋김치가 더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인턴 생활이 전공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도미하였고, 나는 부모님을 방문하기에는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다. 불쑥 엄마에게 나타나서, ‘엄마, 나 배고파!’ 말하던 삶의 한 단편은 이미 지나고 난 후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허기를 엄마와 연결하여 본다.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에게 할애하는 기억은 불공평하다. 당신은 전쟁· 최루탄 연기· 남루함 안에서 표정을 잃은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로 세상을 보고 계시다. 그 시대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단 한 장 흑백 가족사진 속에 있는 그녀는 슬프다. 그 사진 속에는 그녀의 큰아들은 없다. 아들의 아내도 없고, 아들의 큰딸이 나와 함께 앞줄에 웃지 않고 서있다. 그녀의 눈동자와 입매가 엄하다. 한때는 빛났을 당신의 젊음과 웃음을 떠나보내고, 기뻐하여도 된다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그 시대 어머니들의 모상(母像)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70년대에 도미하실 때까지, 40여 개의 전쟁으로 점철된 땅에서 사셨다. 일본의 속국인 나라 잃은 국민에게 일본이 관련되었던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은 조선인들의 전쟁이 아니었던가. 

여러 전쟁을 겪을 때 엄마와 함께했던 나의 손위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대신, 아버지 목마를 타고 피난 길에 올랐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구경했을 터이다. 그러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 전쟁의 잔재인 가난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입학 후에 목격하였던 학생혁명과 이어서 발발한 군사혁명으로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 그중 하나이었다. 쌀 생산량에 비해서 인구가 많았던 한국은 일주일에 하루는 밥 대신 식빵을 먹을 것을 장려했고, 매가지 없는 월남 쌀을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채워야 했다. 출생률이 너무 높다고 판단되었던 때라서 시골 보건소에서는 피임약을 집집마다 다니며 나누어 주었던 때이었다. 그러했던 격동기에, 엄마는 말이 없으셨다. 세상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의 배고픔은 허기(虛飢)가 아닌 허기(虛氣)가 아니었을까? 허기라는 두 글자는 한문으로 달리 쓰이고 뜻이 다르다. 허기(虛飢)란 실제 굶어서 생기는 배고픈 증세를 뜻하고, 내가 겪어온 것은 허기(虛氣)가 맞는다. 내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것은, 정신적, 감성적 허기이다. 

의학에서는 배고픈 이유를 당뇨, 저혈당, 스트레스, 저단백질 음식 섭취, 갑상샘 기능 결핍, 수면 부족, 임신 등 열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그 외에 질병의 이름이 붙여지는 ‘먹는 상황’과 관련된 예도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욕망,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 등 정신적인 또 감성적인 뇌의 기능과 관련된 질병들이다. 

나의 갈증(渴症)을 유발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또 내가 갈구(渴求)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실질적인 부재(不在)와 영적인 부재(不在)에서 온 것이다.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반찬 냄새가 밴 당신이 없다. 먼 곳을 바라보시던 절망과 단념의 눈동자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졌던 엄마에 대한 연민은 머지않아 내가 이승을 떠날 때 대(代)가 끊길 것이다. 이 사이클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2.13.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