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전쟁의 상흔

[LA중앙일보] 발행 2018/06/06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18/06/05 19:36
평화로운 날이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데이.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에 꽃을 꽃아주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는 미국의 현충일이다. 이 풍습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르다. 대충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전사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뜻에서 남쪽과 북쪽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던, 같은 마음의 행사였던 것 같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 국내에는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그래서 미국이 메모리얼데이를 지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뜻은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미국민들은 국군 묘지를 방문한다거나 전사한 장병의 묘지에 꽃을 꽂는 것에, 또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메모리얼데이는 주말을 끼고 하루를 더 놀 수 있는, 공짜로 얻는 연휴라 좋을 뿐이다.

웨스트우드에 있는 국군 묘지를 지날 때마다,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흰 대리석의 묘비를 본다. ‘저 많은 젊은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서? 또는 지구 다른 편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왜 징병되어 가는지를 알았을까? 그들은 열심히 가르쳐 준대로 싸웠고, 나를 위협하는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인간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던 젊은이들이었다. 자꾸 이 죽음들이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의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갈 때까지 명절에 만두를 먹어보지 못했다. 집안의 장남, 제일 큰 오빠는 20대에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두 딸과 아내를 남겼다. 나는 오빠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두 딸도 사진으로만 아빠를 알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휴전이 선포된 후 우리 식구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서울 후암동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때터라고 기억되는데, 엄마는 필요한 말만 했다.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우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엄마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어두운 그늘은 슬픔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많고 많은 세월도 이를 이겨주지 못했다. 엄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만두를 빚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은 깊고, 크고, 오래 간다. 재활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망각은 가능할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나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잃어버린 삶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음습할 것이다.

전쟁이 없던 시대가 없었다. 2015년에도 30개 국가에서 무기를 쓰는 전쟁 혹은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시리아가 좋은 예이다. 내가 잘 못 세었을 수도 있지만, 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중국의 삼국전쟁부터 현대까지 222번나 있었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다섯 개나 된다. 100만에서 1000만 미만의 전쟁은 한국전을 비롯해 10개이다. 1000만까지 밖에 셀 줄 모르는 나는 전사자 숫자를 세다가 포기했다.

세뇌되는 집단은 이성을 잃고, 집단은 평화를 이룬다는 멋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무기는 가슴을 뚫고, 보이지 않는 독가스는 숨을 거두어 간다. 누구를 위한 죽임이고 죽음이던가. 평화가 세상 전체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허무한 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 메모리얼데이에.

‘아태 문화유산의 달’에 생각하는 뿌리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군의관을 전쟁터로 파견하는 바람에 미국은 자국민을 돌보아줄 의사가 부족했다.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외국에서 의사들을 수입(?)해 와야 했다. 나는 수입된 의사 중의 한 사람이다.

수련의 시절, 한국이 내 모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환자들은 자신이나 친척, 지인이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것, 지인 중의 아무개는 한국 고아를 입양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 아주 가난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동양 여자 의사에 대한 차별대우였을까.

요즘 내 환자들은 나의 출신지를 묻지 않는다.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경우, 한국 음식, 드라마, 간혹 자신의 며느리가 또는 사위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기분 좋게 자랑한다. 무엇이 우리를 차별대우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에게 사회정의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간단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얼마 전 손녀들은 ‘아태 문화유산의 달’ 기념행사 공연에서 난타를 곁들인 하나북춤을 여러 꼬마들과 함께 두드리고 추었다. 손녀들은 빨강, 노랑, 검정 원색으로 조화된 농부 차림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띠를 둘렀다. 예뻤다. 일곱 살짜리부터 칠십이 넘은 할머니 학생들이 출연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뿌리 교육’이 아닌, 알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하는 배움의 실천이었다.

흑인 노예 수입, 중국 노동자 착취, 일본 혈통 미국 시민들의 강제 수용 등 유색인종을 향한 분별 없는 잔인한 집단 행위는 미국 역사에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 부끄러운 역사를 넘어서서 최초 동양인(일본인) 이민자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5월, 중국인 노동자들을 써서 미 대륙 횡단 기찻길이 완성된 5월을 ‘아태문화 유산의 달’로 상정한 것이 1977년이었고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법으로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하던 축제를 한 달로 늘린 것은 1990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의 일이다.

러시아 유대인 후손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렸을 때 자긍심이 부족했다고 한다. 흔히 왕따를 당해왔던 그는 자신의 유대인 ‘뿌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사회의 부정의에 눈뜨게 된다.

또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들이 받게 되는 아픔에 대한 시각도 예리해졌다. 그는 자기 부모의 이혼이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하고 10여 년 동안 아버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그는 삶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게 되었고 2차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아버지를 위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국내외에서 약 7억 달러라는 수입을 올렸다. 그는 기계적인 작품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류애를 주제로 하는 많은 명화를 만들었다. 그의 일은 그에게 사회정의를 가르쳤고 자신의 ‘뿌리’를 찾게 했다.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유대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부정의를 볼 줄 아는 인지의 눈, 남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가슴을 갖도록 도와주자. 비록 무엇이 우리에게 사회정의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모르더라도,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연약하게 시작된 ‘뿌리’가 내 가족이나 민족만을 위한 ‘뿌리’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뿌리’로 건강히 자리를 잡아갈 수 있기를 어머니 날, 어린이날이 있는 오월에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얹으면서 바라본다.

‘좋은 의사’란?

김인순 중앙일보 기자와 한 인터뷰 2018.5.

카이저병원의 모니카 류 방사선 암 전문의는 의사는 항상 자신을 업데이트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의학적 실력은 기본, 환자의 마음도 헤아려야
천직 사명감없이 부와 명예 위한 선택은 안돼
창의적이고, 지속적 열정 있어야 진정한 의사

한인 부모의 바람 중 하나가 자녀가 의사가 되는 것인데 과연 지금 미국 병원에서는 의사를 채용할 때 어떤 조건을 주로 보는지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큰 종합병원의 하나인 카이저병원에서 의사 면접 위원회(job interview committee)의 한 멤버로서 참여하는 모니카 류 방사선 암전문의에 좋은 의사의 조건이 무엇인지 채용할 때 어떤 조건들을 보는지 들어 보았다.

-지금 미국의 큰 종합병원에서는 의사채용을 어떻게 하고 있나.

“병원의 특성에 따라 선호하는 조건이 다르다는 걸 먼저 말하고 싶다. 대학병원이나 국립보건국 국립항암연구소와 같이 리서치를 하는 곳에서는 학구적인 면에서 업적이 많은 의사를 선호한다. 이런 의사를 고용함으로써 새로운 리서치를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되고 연구비를 나라나 큰 기업에서 따 올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은 아니지만 큰 그룹으로 어떤 특정의 전공 치료 프로그램이 있는 곳에서는 그 분야에 보다 많은 임상실험 경험이 있는 의사를 선호한다. 일반적인 종합병원에서는 환자 치료 경험이 많으면서 업데이트된 테크놀로지나 최근 개발된 약이나 기술에 익숙한 전문의일수록 환영한다. 또 대학병원과 연관되어 그 대학의 전공의를 가르치는 임상 외래교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어떤 절차를 따르나.

“미국은 공정함을 모토로 삼는 나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의사를 고용한다는 공고를 한다. 이 공고를 보고 의사들이 서류를 제출한다. 제출서류는 자신의 이력서추천서면허증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같은 서류를 받는 특수한 과가 병원에 있어서 서류심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해당되는 과의 과장이나 과장비서에게 통고하면 과장을 위시한 동료의사들이 모두 서류를 리뷰하게 된다. 동료의사들이 모두 다 서류를 보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다’는 의견이 모이면 그때 인터뷰를 잡는다. 만일 이력서에 의과대학 다닐 때부터 리서치를 해서 논문발표를 해왔고 활발한 레지던트 시절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면 유리하다. 큰 병원에서는 5~6명을 뽑아 면접 커미티를 만들어 함께 들어가 지원자와 인사를 나눈 후 각자가 원하는 질문을 다 다른 각도에서 하게 된다. 지원자는 이때 진실하고 참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는 얼마나 걸리나.

“몇 시간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며칠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30년 전 카이저병원에 면접을 왔을 때 이틀 동안 기존 의사들을 만났고 그들이 환자를 볼 때 먼 발치에서 보고 나의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내가 종양 방사선 전문의다 보니 투머 보드(tumor board)에도 참석했다. 반면 산부인과 전문의인 남편은 과장과 만나는 것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최종적으로는 병원장을 만나 채용이 결정된다.”

-과마다 기준을 삼는 의사의 자질이 따로 있나.

“물론 있다. 예를 들어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병리학이나 방사선과를 택했다면 개인적으로 힘들 것이다. 병리학자라면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몸에서 떼어낸 질병부위를 보고 슬라이드를 보고 진단을 내리는 일과를 보낸다. 방사선과는 환자의 몸을 찍은 사진만을 본다. 사람 대하기를 즐겨하는 성격은 환자를 직접 만나서 하는 임상적인 과를 택하는 것이 의사인 당사자나 환자에게 좋다. 반대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직접 환자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의료 분야가 더 적성에 맞을 것이다. 30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내과전문의들은 조용하고 학구적인 사람들이 많고 수술을 하는 외과계통(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등)은 적극적이고 활달하다.”

-일반적으로 고려하는 의사의 성격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인터뷰하면서 얼마 전부터 차별대우를 방지하는 뜻에서 가족사항 질병 여부 성의 선호도(gender preference) 등과 같은 질문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많이 알게 된다. 가장 고려하는 부분은 그 사람이 팀 플레이어인가 하는 점이다. 독불장군으로 혼자 뛰어가는 스타일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만해도 방사선 암치료(수술)를 할 때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하나의 팀을 구성하여 함께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30년 전과 비교할 때 요즘의 의사들이 취업 면접에서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두나.

“나와 같은 이민 1세대에는 취업 인터뷰할 때 ‘질적인 삶’은 옵션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과 큰 메디컬 그룹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면 족했다. 그러나 요즘은 세대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장 먼저 샐러리를 묻고 그 다음은 휴가기간이 얼마인지를 묻는다. 그 다음에 보험혜택 등의 순서이다. 일을 택하는데에도 ‘질적인 삶’에 관심이 많아졌다. 보기 좋고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의사들의 이직은 어떤가? 어떤 때에 의사를 그만두나.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할 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거나(대부분 의대생일 때 탈락한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의사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때 병원을 떠나는 것 같다. 우울증으로 의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의사 자살률은 정확히 나와있지는 않지만 일 년에 약 50명 정도라고 한다.”

-지금 의사를 지망하는 한인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왜 의사가 되려는지 자신에게 묻는다. 흰 가운이 멋있어 보여서? 의료봉사를 해보니 좋아서? 물질적으로 잘 살아서? 부모가 원해서? 이런 것 때문이라면 재고해 보길 바란다. 진정으로 의사가 되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하다면 그때에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계속 해보길 바란다. 인생을 90세로 볼 때 몇 년정도 좀 늦게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해서 부족한 부분을 시간을 갖고 나의 계획에 따라 채워가면 된다. 남과의 경주가 아니다. 의과대학 코스는 정말 힘들다. 그러나 의사가 된 후에도 지속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은 ‘숭고한 천직’이기 때문에 언제나 창의적인 마음으로 계속적인 열의가 없이는 우선 본인이 행복할 수 없다. 환자를 위해 항상 자신을 업데이트 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이다. 그래서 또한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기도 하다.”

뽀뽀하지 마세요!

나는 ‘뽀뽀’를 하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내가 받은 ‘뽀뽀’라면 아버지가 거칠은 턱수염으로 뺨을 비벼 해 주시던 것이 전부이다. 반세기도 전의 일이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외출할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앞에서, 엄마는 한 삼십보 뒤어서 일렬 종대로 걸으시던 시대였다. 누가 보는 곳에서 뽀뽀를 하는 문화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한국에서 ‘뽀뽀’라는 말이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9년 김유정의 ‘애기’라는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쓰이는 ‘입맞춤’의 유아어로 입맞춤 소리인 ‘뽀’가 둘이 모여 첩어가 되어 ‘뽀뽀’가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설이 맞는 것 같다. ‘키스’라는 외래어는 그 보다 더 전에 한국 소설에 등장했다한다. 국어대사전에 뽀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이 1961년이다.

어떻든 ‘뽀뽀’라는 한국말과 ‘키스’라는 영어는 의미가 같아야 할 터인데 왠지 나에게는 두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다르다. ‘뽀뽀’라고 하면 주로 어린이들에게 해 주는 사랑의 표시라는 단순한 뜻이 전부라고 느껴지는 반면 같은 뜻을 외국어로 표시한 ‘키스’라면 성인들이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는 애정의 표현으로 느껴 진다. 내 해석이 좀 과도한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단순한 감정의 표시부터 깊은 유혹에 달 하는 20개 정도의 ‘키스’가 있다고 누가 정리해 놓은 것이 있다. 민족에 따라 스타일도 다르다. 또 입맞춤의 종류에 따라 의미도 다르다고 한다.

봄 방학이라 조부모님들이 손주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손주들을 돌볼 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입에다 하는 ‘뽀뽀’로 하지 마시라고 부탁하고 싶다. 위생상 좋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뽀뽀’를 꼭 입술에 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의 뽈에, 이마에, 또는 머리에 가볍게 해 주는 것도 충분한 애정의 표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좀 큰 경우라면 손시늉으로 하는 블로우 키스(blow kiss)로도 사랑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어른들의 입술이나 구강에는 정상균 무리가 살고 있다. 또 세계건강기구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67% 정도 이상이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 되면 증상완화는 가능해도 완치는 불가능하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우리들이 건강할 때는 잠복해 있다가 면역 씨스템이 약화 될 때 되 살아나서 입술이나 입안에 물집을 만들고, 이를 접촉하는 사람을 전염시킨다. 드물기는 해도 물집이 없는 경우에도전염이 된다. 임산부 생식기에 성병의 일종으로 보는 헤르페스 바이러스 (타입 1, 타입 2)에 감염된 경우를 생각해 본다. 분만시 산도를 통해 나오는 아기가 바이러스에 접촉되는 위험이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출산일 전에 미리 임산부를 치료한다. 이러한 치료가 없었던 시절에는 제왕절개를 했었다. 과거에는 신생아가 엄마의 산도를 통해 감염되어 뇌막염이나 뇌염에 걸리는심각한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증상이 없는 충치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에서 입에대고 하는 ‘뽀뽀’ 뿐 아니라 식기, 수저 공유를 피해 주고, 내가 먹던 음식을 아이에게 먹이는 것도 피해 주는 것이 좋다.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연령층 아이들에는 더더욱 지켜주어야 할 일 같다.

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거짓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합니까?’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 환자의 형은 간호실 앞에서 일하고 있던 나를 붙잡고 절규하며 말했다. 그의 남동생이 방금 숨을 거두었던 터였다. 그의 동생은 대학생이었다.

나는 답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해 한국의 봄은 유난히 길고 쌀쌀했다. 머리가 지식으로 가득차 마치 설익은 과일과 같았던 인턴 시절, 나에게 죽음은 하나의 학설에 지나지 않았었다. 당시 세상을 뜬 젊은이가 겪어 가던 고통스런 투병의 행로에 나는 하나의 구경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의사들은, 나를 위시해서, 아이로니 하게도, 죽음의 순간에 환자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더구나 요즘은 입원환자들만을 치료하는 입원환자 전문의,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전문의들이 있어서 암 전문의라 하여도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만 환자와 마주한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실상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공부하고, 리서치에 가담한다. 환자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도 어쩌면 환자 자신들 보다 더 아파하며 포기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지난 주 당직일 때, 방사선 치료를 마친 동료의사의 환자를 봐 주어야 했다. 데자뷔라고 할까? 열 여덟 살의 흑인 여대생은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일곱 살 때에 백혈병에서 완치되어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복수가 배에 차기 시작해서 귀가하고 백혈병이 재발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완치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알려진 병환부위 전부를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병환부위 일부만을 치료한다면 복수는 줄지 않을 것이었다. 부분에만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복수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확률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그녀는 말했다. ‘이 복수가 없어지면 나는 골수 이식을 받을 거예요. 이 복수는 언제나 줄어 들어요?’

동료의사는 부분 방사선 치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이 그녀의 희망을 꺽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치료를 끝낸 시점에 여대생이 하였던 질문에 그녀가 모르던 혼동되는 답을 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을 조금 두고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암의 말기에 도달한 환자들에게 완치의 길이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무척 힘들다. 그래서 의사들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주치의는 이를 빨리 알려주고 앞 날을 대처하는 플랜을 환자와 함께 짜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지 몰라도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놀랍게도 환자는 적응하는 준비를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 보다 훨씬 잘 해 간다. 이런 첫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환자들은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뢰된 의사들에게서 이런 정보를 듣게 되거나, 완치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면 더 많이 당황하고, 화내고, 깊은 우울에 빠질 수 있다.

‘거짓 희망’은 오래가지 않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지 누가 알랴? 어린 여대생을 보면서,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연륜이 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