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국자인가?

나는 애국자인가?
육중해 보이는 동판 여러개가 벽에 걸려있다. 한국 이름, 영어 이름들이 동판의 가슴에 세겨져 있다. 지난 달 7월, ‘한국어 진흥재단’이 미국 정규공립 고등학교 행정가들을 인솔하여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용산구 옛 육군본부 자리에 있는 ‘전쟁기념박물관’에 들렸다. 교장 중의 한 사람이 첫 줄에 ‘OO 사단’ 이라 써있는 동판앞에 서서 이름들을 읽어 내려 가고 있다. 바로 한국전에서 전사한 20여 만명의 한국군과 유엔군들의 이름이 새겨진 전사자명비였다. ‘누구를 찾으세요?’ 하고 물으니, ‘내 삼촌이요…’라고 대답한다. 삼촌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한 그가 20여만명의 이름 속에 파뭍혀 있는 삼촌의 이름을 찾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나도 전사한 큰 오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그도, 나도 수 많은 이름들 앞에서 침묵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한국민에게는 너무도 처절했던 육이오는, 내 모국이 조선시대 부터 겪은 27번의 전쟁중 하나로, 실상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이차대전이나 월남전에 비해 ‘잊혀진 전쟁’이라 불릴 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던 전쟁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실전에 참가해 주었고, 41개국은 장비, 의약품등 다른 종류의 원조를 주었다고 예비역 대령 출신이라는 백발의 자원봉사 안내원이 설명한다. 통털어 약 18만명이 죽고, 3만3천명이 행방불명, 57만명이 부상을 당한 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니… 미국은 그 16개국 중에 가장 많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잃었다. 물론 남한은 미국 젊은이의 3.8배 되는 약 14만명이 전사했고, 4.4배 되는 45만명이 부상당했다. 이 통계는 군인에 한한 것인데, 일반인에 대한 대략의 숫자는 남한에서만 백만명이라 한다.

전쟁에 대한 강의를 경청하는 행정가들의 모습은 진지하고 엄숙했다. 전시품들은 신라 삼국통일 때의 것 부터, 임진왜란, 육이오를 망라하고 있었다. 모형거북선, 각종의 전투기, 탱크들, 문명이 발달하기 전에 쓰던 창과 칼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리서치’ 를 하는 연구소가 스웨덴 업살라 대학, 핀랜드 오슬로의 평화연구원, 카나다 뱅쿠버의 사이몬 프레이저 대학에 있다. 이들의 자료를 보면2011년 한해동안 37개의 전쟁이 있었고, 현재진행형의 전쟁, 갈등으로 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5개나 된다 했다. 1945년 부터 2012년 까지 만명 미만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13개이다. 만명이상이 죽은 전쟁수는 많지 않다해도, 사상자의 숫자는 엄청나다. 이차대전만 보아도 사십만명이 되고, 3조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

열악한 역사 속에서도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이 만들어 진 것에 교장들은 놀라워 하고, 존경심을 표했다. 누군가 말한 것 처럼, 일제강점기 동안, 한글말을 잃지 않고, 한글을 숨어서라도 배우고 써 왔기 때문에 한구인의 ‘얼’이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백성, 그 후손들이 지은 한글박물관은 웅장하고 멋있었다. 방문객 미국 교장들은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짧은 시간 동안 받은 한국말 렛슨에서 알게된 수월함, 또 그 과학성에 놀라고 감탄했다.

한글이 세계언어로서 일차적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체계적인 정규교육 방법으로 자리를 굳히는 것에는 이들의 관심과 응원이 필수적이다. 혈통, 비혈통을 막론하고 미국 중고교생들에게 한국어 반을 통한 한국어 클래스의 탄생내지는 존재여부를 그들이 최종 결정하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기해서 총영사관저 오찬에서 다시 교장들을 만날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조선이 전부였던 당신 때 보다, 한글의 얼을 세계로 펴는 우리를 보시며, 당신을 닮았다 하시면 좋겠다.

가을 인사

너무 오랫동안 적적했습니다.

부업 즉 ‘한국어진흥재단’이 일이 주업처럼 되어버려 무척 분주한 여름을 지냈습니다. 비록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엘에이 날씨이지만 가을빛이 역력합니다.

이제부터는 자주 글을 올리겠습니다. 저를 아껴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 가을이사를 올립니다.

감사드리며,

모니카 올림

 

손녀에게서 온 카드

오늘 아침에도 ‘소중함’으로 채워진 내가 되어 하루를 맞이 한다. 주위는 밝고 따뜻하고 조용하다.
‘소중한 할머니, 가지고 있다. 멋진 어머니의 일! 알겠어? 스칸디나비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재미있고 안전한 여행을 떠나십시오! 애정, 미준’
이렇게 이상하게 쓰여진 카드를 나는 아침마다 읽는다. 그리고 나의 가슴 깊은 곳을 들여다 본다. 빛과 따뜻함이 서늘하고 깊은 곳을 채워가고 있다.

아홉살짜리 큰 손녀가 어머니 날에 제 어미의 엄마인 나에게 자신이 만든 카드에 구글 (google)사전을 찾아가며, 제가 쓰는 단어들을 번역해서 쓴 글구이다. 나는 그 때 엘에이에 없었다. 접혀진 카드의 다른 면에서는 이렇게 썻다. ‘ Dear Halmoni, Have a grand mother’s day! Got it? Have a great time in Scandinavia! Have a fun and safe trip! Love, Jessica Ryoo Thomas’ Jessica와 Thomas는 내가 붙인 가명이고, 그애의 가운데 이름은 나의 성,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남편의 성이다.

한국말을 하는 혈통, 비혈통의 사람이라면, 이 아이가 한국말로 쓴 사랑의 문서가 엉망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뭐 이런걸 글이라고? 훽~ 던저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카드에 쓴 글씨는 내 아버지의 늘 하시던 표현을 빌린다면 ‘개발 소발’이다.

나는 다시 한번 한글의 과학성에 놀라지만, 언어란 어느 정도 기본적 교육과 실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글은 어순이 영어와 다르다. 생각의 바른 표현은 문화가 끼치는 정서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 아이의 한국말로 한 표현이 문화의 이질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외국 말이란 자꾸 쓰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계 외조부모를 두고, 한국계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한국말을 한다던가, 한글을 쓰고 읽고 제 것으로 만들려면, 이 아이에게도 시간과 관심의 투자가 필요하다. 이미 한번 포기 한 적이 있던 터였다.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Have a grand mother’s day!” 라는 구절을 google을 통해서 직역을 하다보니 한국말의 어순에는 동사가 뒤로 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터라, ‘have’ 를 다른 단어와 붙여서 함께 번역하지를 못하고 ‘가지고 있다’ 라고 따로 쓰고 있다. 또 ‘Got it?’ 이라는 문구는 아이가 평상적인 ‘good’라는 표현 대신 ‘좋은 것 보다 더 멋진, 더 근사한’ 이라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grand’라는 단어를 쓰고, 그점을 강조하기 위해 ‘Got it?’ 했던 것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grand’ 와 ‘mother’를 붙여 쓰면 할머니라는 뜻인데 이 두 글짜를 띄어서 써서 그 효과를 돋 보이게 했다.

다음 주, 나는 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 미국 중고등학교의 교장단, 교육감 팀, 한국어 교사 팀과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장학생 팀을 인솔하고 모국을 방문한다. 첫째와 셋째 팀의 대부분은 비한국계이다. 그들이 한국 땅을 밟으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한국말에 대한 자신의 과제를 나름대로 풀게 될 것을 바라고 있다.

미국으로 귀국한 후, 감사의 카드를 보내 올 것이다. 내 손녀와 달리 철자법, 어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손녀가 쓴 ‘소중한 할머니’, ‘애정, 미준’ 이라는 표현을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한다.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LA중앙일보] 발행 2018/06/18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18/06/17 16:18
그들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스톡홀름 노벨 뮤지엄에 들렸을 때 노벨 문학 부문 수상자들의 스냅 얼굴 사진들을 보며 느낀 것이다.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는 생각이 첫 순간에 들었다. 나 자신이 전시된 사진 주인공들의 나이대에 속하거나 더 늙었는지도 모르는데,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벨 뮤지엄에 들르기 전까지 주름은 추하게 보인다는 분별 없고 습관적이며 반사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 주름도 멋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에 진 주름은 형태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같은 점이 있다면 날카로우면서도 정(精)하고 인자한 눈이었다.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내가 본 그들의 얼굴은 정돈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뿐 아니라 주위의 생명들을 두루두루 끌어안고 떠들어 대는 혁명가가 되는 대신 소리 없는 혁명을 속으로 감당하며 살았기 때문일까. 모든 생명이 숨 쉬는 길목에서 동조자로, 관찰자로 세상을 일깨웠던 연륜이 보인다.

‘두 번은 없다’라는 시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짐보스카(Maria Wisława Anna Szymborska, 1923~2012) 할머니의 마르고 쭈글쭈글한 손을 포착한 사진도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작고 힘없어 보이는 손으로 그녀는 세계를 일깨우는 시를 쓸 수 있었다니.

나는 감동을 자아내는 시간을 노벨 뮤지엄에서 보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비판적인 내가 주입된 지식의 보따리를 노벨 뮤지엄에서 풀었다면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마담 큐리의 이야기를 읽고 외웠어야 했다. 그래서 큐리 부인의 결혼 전의 성(性)이 스클로브스카라는 것도 아는 터였다.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귀화했던 그녀는 물리학, 화학으로 36세, 44세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녀의 가정에서 다섯 개의 노벨 메달을 가져갔다는 것은 역사상 없는 일이고, 그녀는 최초 여성 수상자였다. 노벨상을 받고도 여자라서, 외국인이라서 과학자, 학자의 대우를 손쉽게 받지 못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두 개의 동위원소 중의 하나를 그녀의 모국 폴란드를 기념하며 폴로니움이라 명명할 줄 알았던 여성이었다.

큐리 부인과 남편, 딸 아이린, 사위 프레데릭 졸리옷이 획득한 다섯 개라는 노벨상을 놓고 나는 동료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획기적인 한 가정의 업적이 유전자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들의 결론은 약간의 유전자, 대폭의 환경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가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외부의 압력에 의한 노고가 아니라 개개인의 자발적인 호기심, 호기심을 갖고 찾아가는 끈기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는다. 나의 전공 분야에서 가끔 쓰는 물리현상 ‘브레그 피크’라는 것이 있는데 이 현상은 윌리엄 헨리 브레그 경이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아들 윌리엄 로렌스 브레그는 25살의 나이에 물리학 노벨상을 받았다. 최연소자였다. 환경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나는 네 손주를 둔 할머니다. 부모들인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주면 좋겠다. 노벨 뮤지엄을 나오며 힐끗 보았던 달라이 라마의 안경, 요셉 브로드스키의 타자기가 내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현충일, 전쟁의 상흔

[LA중앙일보] 발행 2018/06/06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18/06/05 19:36
평화로운 날이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데이.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에 꽃을 꽃아주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는 미국의 현충일이다. 이 풍습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르다. 대충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전사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뜻에서 남쪽과 북쪽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던, 같은 마음의 행사였던 것 같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 국내에는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그래서 미국이 메모리얼데이를 지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뜻은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미국민들은 국군 묘지를 방문한다거나 전사한 장병의 묘지에 꽃을 꽂는 것에, 또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메모리얼데이는 주말을 끼고 하루를 더 놀 수 있는, 공짜로 얻는 연휴라 좋을 뿐이다.

웨스트우드에 있는 국군 묘지를 지날 때마다,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흰 대리석의 묘비를 본다. ‘저 많은 젊은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서? 또는 지구 다른 편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왜 징병되어 가는지를 알았을까? 그들은 열심히 가르쳐 준대로 싸웠고, 나를 위협하는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인간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던 젊은이들이었다. 자꾸 이 죽음들이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의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갈 때까지 명절에 만두를 먹어보지 못했다. 집안의 장남, 제일 큰 오빠는 20대에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두 딸과 아내를 남겼다. 나는 오빠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두 딸도 사진으로만 아빠를 알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휴전이 선포된 후 우리 식구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서울 후암동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때터라고 기억되는데, 엄마는 필요한 말만 했다.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우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엄마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어두운 그늘은 슬픔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많고 많은 세월도 이를 이겨주지 못했다. 엄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만두를 빚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은 깊고, 크고, 오래 간다. 재활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망각은 가능할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나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잃어버린 삶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음습할 것이다.

전쟁이 없던 시대가 없었다. 2015년에도 30개 국가에서 무기를 쓰는 전쟁 혹은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시리아가 좋은 예이다. 내가 잘 못 세었을 수도 있지만, 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중국의 삼국전쟁부터 현대까지 222번나 있었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다섯 개나 된다. 100만에서 1000만 미만의 전쟁은 한국전을 비롯해 10개이다. 1000만까지 밖에 셀 줄 모르는 나는 전사자 숫자를 세다가 포기했다.

세뇌되는 집단은 이성을 잃고, 집단은 평화를 이룬다는 멋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무기는 가슴을 뚫고, 보이지 않는 독가스는 숨을 거두어 간다. 누구를 위한 죽임이고 죽음이던가. 평화가 세상 전체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허무한 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 메모리얼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