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매사 형통하는 2018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희는 ‘세배 세리모니’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글에 쓰여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그저 바삐,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살다보니, 제일 귀한 사람들, 바로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를 알리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맏절을 하며 서로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랑을, 배려를, 존경을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좋았습니다. 젊은이들도 좋아했고, 서로 감사하는 마음들을 다시 찾아 앞으로 내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알겠거니…’ 하지 말고 알려주는 생활 방법을 취하고 싶습니다.

그 사이 저에게 떨어진 ‘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이라는 새로운 임무 때문에 무척 바빳습니다.

한국어 교사 연수를 주관하였지요.
전국에 있는 공립 중고교 한국어 교사들을 모아 연수를 하는 일인데
올해의 토픽은 ‘How to use Technology in Korean Language Classroom’이었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토픽으로, 그 성과가 좋았고 long term 성과는 더 좋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작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어 반을 신설했습니다. 마지막 두개의 학교는
San Diego, Poway District에 있는 D39 이라는 공립학교이고,
또 한 학교는 Nevada, Las Vegas에 있는 DPPS Agassi Campus 였습니다.
DPPS 란 Democracy Prep Public School 의 약자입니다.
99%의 학생들이 유색인종이고, 저소득층 학교이지만
안드레 아가시의 영향으로 학교가 잘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가서 MOU 에 사인을 해야 했습니다.

어떠든,

이제부터는 자주 저의 웹사이트에 글도 올리고 여러분들과 소통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첫 토요일 아침,
캘리포니아, 엘에이에서,

류 모니카 올림

‘세배 세리모니’

설날이라는 이름을 받은 날이 있어서 좋다. 생일이나, 대보름, 추석이라는 명절을 피해 왔던 내가– 변했다.

올해 설날, 이젠 부모가 되어 제 아이들을 돌 보고 있는 딸들, 조카들 가족과 함께 떡국과 빈대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니 기뻣다. 새벽 꽃 시장에가서 꽃을 사오고, 집을 가꾸었다. 크리스마스 디너 세트를 치우고 동양식 그릇들로 교체했다. 꼬마들이 바닥에 모여 앉아 떡국을 먹을 수 있게 다듬어 만들어진 나무 밥상도 펴 놓았다. 그들 자리 앞에 작은 간장종지, 앞 접시, 예쁜 떡국 그릇, 한국식 수저를 놓아 준비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지만 나는 종이컵이나 종이접시를 쓰지 않는다.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실상 난 잘 차려진 상차림이 좋다.

한국서 이곳에 연수하러 온 두 친구들의 아들과 가족들, 친지, 아이랜드에서 다니러 온 조카가족들 까지 꽤 붐비는 떡국 행사가 되었다.

될 수 있으면 한복을 입자고 제의했다. 딸들과 사위들은 결혼 때 만든 한복이 있고, 손주들은 친구가 보내 준 당의, 도령모등 아주 화려한 옷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모두 단벌 신사들이긴 하다. 그런데 보니, 남편은 한복이 없었다.

남편은 한복 샤핑에 함께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년에 한 번씩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러 한복을 마련하곤 했던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한국 비단을 구경하는 기쁨도 있다. 둘둘 말아 진열장에 곱게 뉘어져 있는 한국 비단은 아름답다. 화려한 색갈, 교묘한 무늬는 감탄 할 만 하다. 여러 색갈의 조박지들을 이어 만든 상하 한 벌의 옷이 잘 어울려 준다는 것이 희안하다.

고대에 전투복으로 쓰였다는 쾌자를 골랐다. 쾌자란 입는 사람에 따라 고위층으로 또는 하졸로도 보일 수 있는 옷이라는 해석이 있다. 쾌자는 두루마기 처럼 생겼지만 소매가 없다. 그래야 싸울 때 거치장 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본 쾌자의 앞면과 뒷면 끝자락 부분에는 붓으로 흘려 그린 듯 보이는 풀잎 모양의 패턴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푸른 빛이 도는 비둘기 색이 나는 완성품이었다. 거의 모든 쾌자가 그렇듯이 등쪽 겨드랑이 선 중앙에서 부터 아래로 스플릿이 있었다. 그래서 움직일 때 펄럭인다. 꽤 멋있어 보인다. 남편도 편안해 했다.

떡국을 먹기 전에 우리는 ‘세배 세리모니’를 했다. 우선 어른들이 딸, 사위, 손자 손녀들 앞에서 먼저 서로에게 절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존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알고 있겠지….’ 하면서 살아 온 우리들이다. 그래서 절하는 중에 서로를 생각하자 모두 동의했다. 의외로 젊은애들도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자신들의 어려움을 서로 감지했던 터였나?

꼬마들이 어른들에게만 하는 세배가 이어졌다. 아이들 조차도 깊숙하게 바닥에 까지 엎드리면서 천천히 절해 주었다. 급히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 좋았다.
한번도 유통된 적이 없다는 새 돈으로 준비한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선사했다. 아이들은 5불, 어른들은 10불. 작은 선물이지만 이것이 주는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이 매일을 감사하며 살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이 뿌리는 삶의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가 주었으면 더 좋겠다.

도장, 볼펜 그리고 환자

아버지의 글 앞에 선다. 내리 방향으로 화선지에 쓰신 글은 시(詩)인 것 같다. 아버지가 흘려 써 내려간 시는 열네자의 한문자(漢文字)로 되어 있다. 초서로 쓰신 부분이 있어 전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무슨 뜻일까. 언제 쓰셨을까?

우측에서 좌측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진 두 줄의 시. ‘작일쾌청(昨日快晴)….인생(人生)…부침(浮沈)…’ 이라고 되어 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덧 없다는 뜻 같다. 끝 막음한 시의 왼쪽에 조금 작고 가늘게 또 한 줄의 흘려서 쓰신 글이 있다. 완성한 년,월 같고 아버지의 호(號) 처럼 보이는 세 글짜가 작품을 끝내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두개의 정사각형 인각이 상하로 찍혀 있다. 빨간 색이다. 재어 보니 4 센치미터의 도장이다. 시의 영역 밖, 화선지 오른쪽 위에 훨씬 얇고 긴 사각 형태를 한 또 하나의 빨간 인각이 찍혀 있다.

아버지의 호(號)가 새겨진 도장 안의 한문을 해독하지 못해 아버지의 호가 무엇인지 터득하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말이 되지 않지만, 사실이고 그래서 안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갖게 된 것이었다. 빛 바랜 흑백사진들과 함께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한국 전통 양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플랙시 글라스 액자 안에 화선지를 띄웠다. 멋 있다. 작품은 동양화만 모아 놓은 곳에 걸려 있다.

막내로 늦게 태어 난 나는 아버지와 가깝지 않았다. 아버지의 필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서예를 쓰시는 모습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의 흔적이라고는 두 장의 서예품과 옥편(한문사전)이다. 아버지는 책, 노트북, 연필, 만년필 같은 학용품을 귀히 여기시었다.

그 작품 앞을 지나칠 때 마다 느린 붓의 움직임과 붓날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끝막음을 하시며 떨군 검은 먹의 모습이 멋있다. 무슨 생각을 하시며 쓰셨을까. 분명 아버지는 새벽에 먹을 갈고, 붓을 잡으셨고 천천히 선을 그으셨을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 그리고 나.

지난 한 달 동안 미 동남부, 한국을 거쳐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여행 중 어느날 지나치던 쇼윈도에서 빨간 펜을 보았다. 되돌아 가게로 들어 갔다. 고인이 된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붙여 만든 한정판의 볼펜이란다. 글래머였던 그녀는 단순한 디자인의 빨간 원피스, 한 줄 짜리 아코야 진주 목거리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는 단순함이 아름다움을 더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었나보다.  그래서 볼펜은 빨갛고,  클립은 진주 하나로 끝막음 되어 있다. 펜은 싸지 않았다.

어이 없게도, 아버지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아버지는 저 쪽 세계에서 자주 나에게 되 돌아 오신다. 새벽 침묵 속에 움직이는 연필의 나무 향기 가운데. 아버지의 표현대로 ‘개발소발’ 마구 써가는 내 필기 가운데. 검은 옷칠한 일본 가옥 처마에. 또 친구가 선사한 인각도장과 함께.

인각도장은 친구에게서 선물로 일본 여행 때 받은 것이다. 도장을 한참 들여다 본다. 아름다운 무늬가 이리 저리 흐르고 있는 돌, 제법 무거운 옥돌에 나의 한국이름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아버지의 인각 만큼 큰 네모진 도장이다. 나는 과연 ‘이소승다(以小勝多)’의 마음가짐으로 붓과 먹을 써서 마음을 표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이 아닌 시로 써 낼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처럼 한문으로 화선지에 획을 긋지는 못 할 것이다. 대신 아름다운 한글로 획을 그으리라.

 

한국어진흥재단 새 이사장에 말보로스쿨 이사 10년 경력 모니카 류 방사선 종양전문의

 

다음 은 제가 한국어 진흥재단  board president로 선출 된  기사입니다.  장연화  중앙일보 교육부장님이 보도한 것입니다.  

문외한으로 구경만 하고 있다가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밀려서 받게 된 것이라고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더 배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humbling experience 가 될 것입니다.

관련된 이사님들은 교육 administrator, 교수, 변호사, 학부형, CPA, writer, 교장선생님, 은퇴 교사등이 활동하고 계시고, 이 중요한 non-profit organization에  기능, 자질, 시간 부여를 하시고 계시면서  또한 저를 도우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답니다. 

 

“미국 내 초.중.고교 공립학교에 한국어 반이 더 많이 개설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하겠습니다.”

지난 21일 열린 한국어진흥재단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이사장으로 추대된 류 신임 이사장은 “후손들을 위한 교육 재단의 이사장으로 뽑혀 그 어느 때보다 어깨가 무겁다”며 “타인종 학생들에게 더 많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도록 지원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방사선 종양 전문의이자 LA지역 명문 사립학교인 말보로스쿨의 이사로 10년간 활동했던 류 신임 이사장은 특히 “올해부터 LA통합교육구가 이중언어 교육 확대 정책을 채택한데다 관련 주민발의안도 통과돼 그 어느 때보다 한국어 공부에 대한 필요성과 수요가 늘고 있다”며 “한국 정부의 후원과 협력을 받아 한국어반 공급과 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일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어진흥재단은 22년 전 미주 한인 2~3세들이 학교에서 정식으로 한국어를 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해 배울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이후 미 전역 공립학교에 한국어 반을 설치하는데 앞장서면서 대입시험 과목인 SAT 서브젝트 시험에 한국어를 외국어 시험으로 정식으로 등록시키는 업적을 일궈냈다. 뿐만 아니라 교장 및 교감 등 로컬 지역의 교육 행정가들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교육자를 위한 한국 초청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한국어반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한국 연수 기회를 제공하며 공립학교내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끌어왔다. 이같은 활동에 힘입어 최근 2년 동안 남가주에 한국어반이 잇따라 개설되면서 한국어 교육붐도 다시 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올해 목표로 샌디에이고 지역 공립학교내 한국어반 신설 캠페인과 2년 뒤 시작될 가주 교과서 채택 과정에 필요한 캠페인을 설명한 류 신임 이사장은 “새로운 업무이지만 학생과 학부모를 생각하고 재단을 끌어가겠다”며 관심과 협력을 부탁했다.

길옥빈 전 이사장이자 신임 부이사장은 “이사들의 절대적인 협력과 도움으로 한국어반을 많이 개설할 수 있었다”며 “LA통합교육구에는 한국어 교육이 자리를 잡았지만 샌디에이고 등 타 지역은 아직 모르는 학교들이 많은 만큼 한국어 홍보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길 신임 부이사장은 이어 “한국어진흥재단의 특징은 후손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비영리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을 조성해 프로그램을 운영한 곳”이라며 “앞으로는 실력과 자질을 갖춘 우수한 한국어 교사를 계속 배출할 수 있도록 교사 양성 프로그램 운영에도 힘을 쏟겠다”고 덧붙였다.

장연화 기자

진정한 힐링이란 무엇인가?

아미르의 아트 클래스를 벼르고 벼르다가 참석했다. 아트 클라스에 온 환자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클래스가 시작된지 얼마 후 명랑하고, 주위에 신경을 쓰는 듯 보이는 두 여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이미 치료를 마친지 일 년이 넘었다 했다. 치료중에 했던 아트 클래스가 좋아서 잊지 않고 참석한다 했다. 이 두 여인들은 자신의 투병 이야기를 현재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 했다. 열 다섯 명의 환자들과 두 명의 레지던트, 그리고 내가 함께 했던 클래스는 종양 방사선과 레지던트 아미르가 일 년 반 전에 만든 것이었다. 아미르는 의과대학을 다닐 때 홈리스들을 위해서 아트 클래스를 만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의사 지망생 청년이 홈리스들에게 눈을 둘 수 있었다는 것에 나는 무척 감격했다.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런 젊은이들, 남을 배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내적인 강인함을 가진 젊은 세대를 볼 때 겪고 있는 현실이 암담해 보여도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미르를 보며 기억되는 청년이 있다. 딸의 의과대학 졸업식장에서 소개 받은 딸의 졸업동기생이다. 그는 변호사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일 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변호사도 필요하지만 의사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의과대학을 지망했던 젊은이였다. 사회정의와 자선의 실천을 병행하는 어려운 삶을 택한 것이었다.

아미르에게 왜 환자들을 모아 아트 클래스를 열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환자들의 힐링 과정을 견고히 또 빠르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힐링’을 도울 것인가?

얼마 전 부터 ‘힐링’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비지니스 의미를 갖고 미디어에 범람해 왔다. 한국 사회에서 힐링 열풍이 시작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자기 개발서라는 이름으로 팔리던 힐링도서, 여행사가 광고하는 힐링여행, 도심지를 떠나 특수 지방을 띄우는 힐링산책로등 많은 작품들이 보여졌고 들어보면 그럴 듯 하다. 한 때 한국의 어떤 대학에는 힐링학과가 있었다고 하니 좀 어이 없는 일 같다. 그런 사회 변화를 구경하고 있던 차에 아미르의 답변은 나에게 숙고의 여지를 부여했다.

‘힐링’이라는 단어는 ‘온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위키피디아는 설명한다. 우리 몸의 기관이 밸런스를 잃었거나, 아프거나, 파손 되었을 때 본래의 건강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힐링’의 결과는 육체적으로 원상복귀가 되지 않아도 기능이 회복되는 것 만으로도 완수된다는 설명이다.

‘힐링’ 과정은 개인적이다. 아프고, 힘들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짧은 시간에 이룩할 수 없다. 또 고뇌의 기간을 거쳐야만 한다. ‘힐링’을 판다는 마켓에서는 ‘힐링’을 살 수 없다. 잃어 버렸거나 파손된 자신을 찾는 끈임 없는 노력, 그래서 긍국적으로 갖게 되는 자긍심, 나아가서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능력을 얻어야만 성취되는 것이 ‘힐링’이기 때문이다.

아미르의 환자들이 그림을 그린다. 캔버스에 형태를 그린다. 병들어 불완전하고 볼 품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더 아프다. 그 형태 사이 사이를 물감으로 채운다.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또 까맣게. 빨강과 파랑을 섞으니 보라빛이 된다. 아, 여기 황금 노랑색이 있네! 희망이 보인다. 그들은 나를 아물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