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태어난 날에

몇 년쯤 되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나와 남편에게 자그마한 꽃다발이 배송되곤 한다. 짧은 노트와 함께… ‘사랑, 삶, 그리고 세상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엄마(umma), 아빠(appa)’. 어제도 예년처럼 꽃다발을 받았다.

둘째 딸은 제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매년, 자기 생일에 꽃을 보내온다. 제가 태어난 날을 기념일이라 여기고, 부모인 우리가 제 출생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 같다. 딸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의예과 시절에 생명이 창조되는 도중에 멈추어져서 실험실에 도달한 생명 없는 생명들을 보았고 그들을 갖고 실험했다. 각각 다른 창조 시기에 있던 그들은 의과대학생들이 현미경을 이용해서 공부하도록 굳혀진 후, 마이크론 두께로 잘려지고, 염색 과정을 거친 슬라이드에 부착된 상태이었고, 어떤 경우에는 포르말린 병에 갇혀 둥둥 떠 있었다. 창조되었던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과학도들에게 묵묵히 제 몸을 내어놓고 있었다. 종교적 차원과 철학적 견해를 떠나, 과학을 하는 사람이 ‘생명 옹호’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보호받은 애초의 생명은 엄마의 자궁 안에서 약 280일 동안 자라고 때가 되면,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때 빛을 보고, 공기를 들여 마시는 순간이 있던 날을 우리는 생일로 기념한다. 말 그대로 생일이지, 생년월일은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생일’, 즉 ‘만들어진 날’이란 처음 창조되어 엄마의 자궁 안에 정착한 때를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보까지 알 수 없는 우리네 형편이다. 그래도 법적으로 나이 계산에 대한 새로운 규칙이 생기기 전에 한국인들이 쓰던 나이 계산법, 즉 태어날 때 한 살인 것은 꽤 과학적이다.

생일(birthday) 와 출생일(birthdate)은 한 사람의 출생에 관련된 날을 표시하는 두 종류의 방법이다. 생일은 태어난 연도, 시간과 상관없이 날짜만을 뜻하고, 양력이나 음력을 따르는 나라, 고장, 가정이 있다. 출생일은 태어난 해, 달 그리고 날을 함께 명시하는 경우이다. 한국에서는 출생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대신 생년월일이라고 표한다. 생일은 사람뿐 아니라, 회사, 학교 같은 기관도 창립일로 기념하고 축하한다.

출생일 또는 생일은 개인이 갖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정보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한다. 우리들의 권리나 의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성장 중인 아이는 어른의 보호가 필요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아이를 보호하는 보호자가 담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성인이 되면,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으면 내 맘대로 퇴학해도 된다. 의무교육이 적용되지 않는 나이이다. 또 성교나 결혼할 때,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술, 담배, 로또 살 권리가 있다. 투표권과 공직에 출마할 권리도 있고, 운전면허도 받을 수 있다.

책임이 주어지는 법적 의무가 어른이 되면 그 효력을 발생한다. 그 예가 한국에 있는 병역의 의무이다. 의무를 회피하고 이탈하게 되면, 범죄자가 되므로 구속되고, 벌금형을 받거나, 영창 생활을 하는 일도 있다. 미국은 병역의 의무 즉 징병제가 1973년에 폐지되어, 군대 지원을 원하면 나이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른은 몇 살부터인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나이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르다. 12살에서 21세 사이에 성인으로 입성한다. 미국의 경우는 주(州)마다 다르다. 보통은 18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하지만, 앨라배마, 콜로라도, 메릴랜드, 네브래스카주(州)는 19세부터 성인이고, 워싱턴 디시, 인디아나, 뉴욕은 21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한다니, 놀랍다.

어떻든, 생일이 관련된 문화 행사도 꽤 있다. 예수의 생일로 서방 국가들이 정한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가 축하한다. 한국은 만 한 살 될 때 ‘돌’ 잔치, 60살 때 환갑을 축하하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은 딸이 16세가 될 때 ‘스위트 열여섯 살’ 파티를 하여 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15세에, 필리핀의 경우는 딸은 18세 때, 아들은 21살 때, ‘데뷔’ 파티를 연다. 유태인은 12살 때 여아(女兒) 바트 미츠바, 13살 때 남아(男兒) 바 미츠바 성인식을 결혼식 버금가게 종교와 민족 의례를 합쳐서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른다.

제 생일날, 꽃다발을 보내 준 딸은 남편과 내가 뉴욕주립대학 시러큐스 캠퍼스에서 혹독한(!) 수련 의사 과정을 거치고 있던 때, 편안하고 즐거운 태교(胎敎)를 받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나와 함께 받으면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최 북쪽, 중강진과 같은 위도에 있는 시러큐스는 강추위에, 스노우 벨트 중심지에 있어서 흐린 날이 많고, 눈도 많이 내렸다. 그 애가 태어나던 새벽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밤새 함박눈이 사뿐히 내려와서 세상의 더러움이나 어려움을 모두 덮어 주던 그날, 막 모습을 드러내며 밝아오던 여명에 세상은 창백하게 눈부시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를 환영해 주었던 함박눈에 덮이어 티 없이 완벽했던 세상이 그렇지 못한 세상과 함께함을 배웠다.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가는 초 중 고교 학생들을 학생 실습에서 보기도 했다. 만화소설 ‘파우어 온!’은 그래서 탄생했다. 그래도 그 애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처음 보았던 그날을 기념하면서, 제 부모에게 꽃다발을 보내 주었다.

중앙일보 문예난 2024.12.27

‘자랑스러운 경기인’수상 소감

경기여고 54회/전 월화 (AKA Monica C. Ryoo, M.D.)

올해 2024년 ‘동창의 날’ 행사가 10월 19일에 동창회관에서 있었습니다. 모교를 떠난 지 58년이 되었고 디아스포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온 지 반세기입니다. 이 특별한 날에 31돌 ‘자랑스러운 경기인’ 상을  모교 선후배 동문님들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이 수상(受賞)으로 저는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또 제가 누구인지를 숙고합니다.

재학시절 모범생도 아니었고, 인기가 있거나, 리더십을 발휘했던 제가 아니었기에, 조금 변명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걷지 않고 뛰어넘으면서, 때로는 달리면서 나의 길을 갔습니다. 반세기를 모국 밖에서 살아온 저에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적인 것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필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의업이 천업인 제가 한국어 진흥을 하게 된 것은 필란트로피(philanthropy) 사상에 입각한 것입니다. 자선(charity)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문제 완화를 위해서 도와주는 활동이고, 필란트로피(박애정신)는 도움이 필요하게 된 원인을 찾아서 연구하고, 이에 적합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라 설명됩니다. 교육체제가 없어서 여아들이 배우지 못했던 조선 말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가 그 예입니다. 당시 그분들이 만든 고아원은 자선의 실천이었습니다.

필란트로피는 필로스(philos), 즉 사랑이라는 뜻의 말과 인류라는 뜻의 안트로포스(anthropos)의 복합어로, 인류애라고 번역되겠습니다. 한국어 진흥은 교육 결여에 대한 필란트로피로 미국내 혈통 2세, 3세 영역을 넘어서서, 타인종에게 세계언어 교육 혜택을 받도록 하는 활동의 일부이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서면서 간접적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이 한국적인 나의 일부 또는 전부는 한글을 익히기 시작하던 걸음마 아기 시절부터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정동 일번지에서 다져지고 연마되었습니다. 정동 일번지는 옛 덕수궁 부지로 1945년부터 1988년까지 경기여중고 캠퍼스가 있던 곳입니다. 저의 학창 시절을 보내었던 정동 일번지 캠퍼스에는 회화나무 고목이 교정 가운데서 학생들의 쉼터가 되었지요. 대한민국이 가난했던 때이었지만, 모교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수영은 체육 시간에 필수로 익혀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운동장 한 구석에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를 배우고, 시험도 치루어야 했습니다.

모교에서 제공하였던 학과목들을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시던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과목 이외의 음악 교육, 미술교육은 충분하고 훌륭했습니다. 음악 전문인이 아니라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뮤직론을 배웠고 한국 가곡, 아리아, 외국민요도 노래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시간도 알차게 주어지었고 추상화, 큐비즘을 구별하고 논할 수 있는 박학한 졸업생의 삶을 허락한 곳이었습니다.

인생을 삼막(三幕) 연극(演劇) 무대로 생각해 봅니다. 연극 첫 장에서 나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엑스트라로 무대에 세워졌습니다. 그때, 이미 한글은 내 안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서는 감독과 몇 번 다툰 후에 설득당하고 나서, 조연역을 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대에서 한글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章)인 세 번째 연출은 마음에 듭니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 커튼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여러 번의 변신과 변모가 저의 각색, 저의 연출 그리고 저의 감독하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셋째 장에 놀라운 ‘자랑스러운 경기인’ 상 팡파르가 울리었습니다.

경기여고, 대한민국, 한국인의 피와 뿌리…이를 연결하는 한글이 오늘도 제 인생의 셋째 장(章)을 뜻깊게 합니다. 정동 일번지에서 썼던 이천(二千) 일의 신화가 졸업 후 이만(二萬) 일의 신화로 이어지도록 정(情)과 열(熱)을 허락해 주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이만(二萬) 일의 신화를 잘 써가리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마칩니다. 이 글을 쓰는 엘에이의 크리스마스 새벽 시간은 따뜻하고,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경기여고 동문회지 2025년 1월 호에 나갈 원고입니다.

조부모의 날과 한국어 클래스

너무 늦게 세상에 온 나는 아버지 쪽, 어머니 쪽, 조부모님을 뵌 적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자식을 두기에는 늙었던 부모님은, 실상 꽤 늙어 보이셨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큰 오빠의 딸이 함께 살았고, 같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조카가 연상(年上)이었기에, 우리 집안의 가족관계를 주위에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부모 회의가 있을 때, 나는 아버지나,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친구들은 ‘야, 월화야, 너희 할머니 오셨다!’라고 큰 소리로 알려주곤 했다. 피하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조모(祖母)가 된 지 오래되었다. 큰딸의 막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조부모의 날 축하연에 초대한다는 이메일이 도달했다. 5학년 학생들이 강당에서 환영 공연을 할 것이고, 공연 후에 조부모들은 손주들의 교실로 각각 안내되어 교육환경을 관람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조부모들은 가정에서 아끼는, 뜻 있는 아이템을 갖고 와서 손주들과 함께 물품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 주기 바란다는 내용도 있었다. 집안에 가보(家寶)는 없지만, 의미 있는 물건이 있는지,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탈가주(脫加州)한 큰 딸네 사는 곳은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친구를 그리워하는 손주들은 할머니가 해 주던 한국 음식도 먹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지만, 의과대학을 다닌 관계로 실험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손주들과 가끔 음식 만드는 실험을 하곤 했다. 음식의 유행, 흐름은 어쩌면 그렇게해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만드는 음식들은 ‘퓨전’ 즉, 잡종이라는 것도 아이들은 잘 안다.

콩나물 같은 음식 자료와 그 애들이 필요할 것 같은 라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챙겨서 자동차로 운전하여 다녀왔다. 놀면서 또 쉬면서 서둘지 않고 하는 자동차 여행이 나쁘지 않았다. 가보는 없지만, 골동품인 ‘목수용 줄 금이(line marker)’를 가져갔다. 눈금 긋는 기구가 없던 조선시대 때 목수가 썼다는 까만색 7인치 길이에 4인치 정도의 나무로 만든 것이다. 먹물을 담는 동그랗게 패인 미니(mini) 우물 같은 부분이 있다. 먹물을 갈아 넣고, 흰 실뭉치를 담그어 까맣게 물감을 들인 후, 미니 쇠 손잡이를 돌리면 반대쪽에 있는 못대가리만큼 작은 구멍을 통해서 실을 잡아당길 수 있다. 물감이 먹힌 까만 젖은 실을 이용해서 벽이나 땅에 눈금을 그으면 된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든 천재적인 기구이다.

한국을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의 기회이므로, 한 면은 진한 빨강색, 다른 한 면은 진한 바다 색깔의 한국산 보자기에 쌌다. 골동품과 보자기 모두를 보여주면서 발달했던 조선시대 문명과 역사를 설명했다. 다른 조부모들이 가져온 귀중품 중에는 세계대전 참전 사진도 있었다.

손주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동양 아이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백인 계통으로 보이는 조부모님들의 증언을 듣다 보니, 흥미롭게도, 모두 다민족, 다국적으로 섞인 사람들이었다. 동양 계통이 없었을 뿐이었다. 나눔이 끝난 후, 한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윈트의 할머니는 한국분이시군요. 나의 부모님, 증조부님들은 여러 나라 출신인데, 나의 1/8이 동양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상체 1/8? 아님, 몸의 왼편 1/8이요? 어느 부분이 동양에서 받으신 부분인지 궁금합니다!’

뉴멕시코주(州) 교육청 웹싸이트를 보면 40여 개의 교구청/학교들이 이중문해력인증서(Seal of Biliteracy)를 발급한다고 되어있다. 한국어 이중문해력인증서는 두 군데 학교에서 2015~2016년에 발급하였다. 한국어가 아직은 정규 과목으로 채택되지는 않고 있다. 뉴멕시코 인구의 2%가 동양계이고, 한국인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동양계의 약 10% 넘는 4.80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엘에이교육원 통계에 의하면 한 개의 한글학교(주말학교)가 활동 중이라 한다. 그나마 한글학교가 있어서 고맙다. 엘에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비동양계가 다수인 뉴멕시코 학교들에 한국어 클레스를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주중앙일보 [오픈 업] 2024.4.10

‘4·19 학생운동’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색 교복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이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육이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이었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달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엘리옷(T.S.Eliot 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를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하면서 시를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옷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옷은 미국 출생이었는데,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만(Walt Whitman)과 제프리 차우서(Geofrey Chaucer)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집기도 많이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 일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육이오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상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퓨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치열했던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은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2024.4.26 [문예마당]

일등(一等)과이등(二等) 사이, ‘햇빛 교육’

큰 딸네가 고심 끝에 탈가주(脫加州) 했다. 교육에 관련된 이유가 가장 크고 많다. 방문해서 손주들의 활동 새 캠퍼스를 돌아보고 있다. 대학처럼 넓다. 나지막하게 아도비 식으로 지은 건물이 여럿 보인다. 건물 사이 사이에는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된 정원들이 있고, 어떤 정원은 몇 개의 건물 통로들로 둘러싸인 건물의 구심점인 ‘아트리움’ 형태이다. ‘아트리움’이란 중앙 홀이라는 뜻인데, 의학에서 ‘아트리움’은 심방(心房)을 일컫는다. 동선과 조경을 염두에 둔 설계로, 학생들은 건물들의 통로 한쪽 면 유리벽을 통해서 쾌적한 작은 자연을 보면서 복도를 지나다닌다. 어떤 정원의 중간에는 연못이 자리하고 아담한 관목들이 둘러싸고 있다. 연못 어딘가에 거북이가 살고 있단다.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정원은 학생들의 침묵과 묵상의 공간이다. 틴에이저들이란 팝 뮤직에 열광하는 철없는 세대라는 편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들이 삶과 학습에 고심하는 긍정적인 노드(nerd)이기도 하다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그들대로 고민거리가 있다.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용기와 능력도 있다.

건물 밖을 나오니, 나이깨나 먹은 꺽다리 플라타너스 고목들이 샛노란 이파리를 달고 있다. 잊고 있던 학창시절 가을날 같다. 나의 기억엔 가을이란 고민의 계절이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의 가을은 새빨간 단풍잎들이 복잡한 사고(思考)를 정리해 주지 못했다. 잡히지 않는 미래를 향한 염려와 희망은 가을 ‘계절병’의 농도를 부추겼다. 이곳 시골스러운 중고교에도 엘에이 유수 학교와 다를 바 없이, 고심해야 하는 아이텀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교정 한편에 자리한 축구 경기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응원의 함성이 실없는 고민은 고만하고, 멜랑콜리를 날려 보내라 한다. 아이들은 듬직하다. 그들의 열중하는 모습이 싱싱하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동급생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이다. 함께 화학 실험을 하고,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면서 각자의 악기로 음악을 만들어 내고, 햇빛 속에서 달린다. 무럭 무럭 자라는 봄날의 푸른 나뭇잎처럼 싱싱하다. 아, 이것이 내가 늘 부러워했던 ‘햇빛 교육’이 아니던가!

나는 모국에서 모든 정규교육과정을 끝내고 도미한 후, 뉴욕주립대학 의과대학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두어 해 전 쯤 부터인가,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치맛바람이 왜,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심하게 불었다. 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세 종류의 치맛바람 중, 가장 심하게 불었던 바람이 교육제도를 흔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계 모임 같은 경제 분야를 흔들던 치맛바람, 춤바람들이 있다.

치맛바람은 매사에 최고이어야 한다는 학구열을 부추기었고 당시 학생이었던 세대는 치맛바람의 피해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등(一等), 이등(二等) 또는 일류(一流)와 이류(二流), 하다못해 금수저, 은수저, 흑수저 등, 수저 계급(階級)제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하던 ‘일등병(一等病)’ 교육이 아니었나.

그런 가운데, ‘일등병(一等病)’은 예방이 가능한 것이라 깨닫게 했던 클래스가 있었다. 중학교 입학 후, 미군 장교 부인이 잠깐 영어 시간을 맡은 때이었다. 그 선생님은 ‘하나뿐인 최고’라는 표현은 옳지 않고, ‘여러 최고 중의 하나(One of the Best)’라는 표현이 맞는다고 했다.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가 전전긍긍하며 달리고 도착하려는 정점에는 한 명이 먼저 도달 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말하는 교육의 정의는 ‘인간 형성의 과정이며 사회개조의 수단이다……사회발전을 꾀하는 작용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영어 참고서에는 교육이란 지식, 기술과 형질, 특질의 전수(傳受)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한 인간이 비판적 사고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덧 붙여 설명한다. 한국적 정의는 사회에 귀결하고, 서양적 정의는 개인의 성장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주들과 차세대들이 동서양의 철학이 함께하는 ‘햇빛 교육’의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그 가운데 건강하고 긍정적인 공부벌레 노드(nerd)가 된다 하여도 상관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