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2026.2.11 울산광역매일

새벽은 아름답다. 캄캄하고 신비스럽다.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겨울 새벽은 춥지 않고 선선하다. 정적을 깨는 아침 새들의 대화가 시작되려면 아직 어둠이 얇아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물론 야밤에 노래하는 부엉이도 있고,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러 소견을 전달하는 새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새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오늘 새벽하늘은 어둠 속에 푸르다. 반달과 오리온 좌가 총기(聰氣) 바랜 흐린 빛을 보내준다.  

나는 새벽에 관한 것들에 익숙하다. 새벽 시간, 새벽 소리, 새벽바람, 새벽하늘, 새벽 별자리, 새벽을 열며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헤드라이트 행렬, 새벽에 올리는 분심(分心)으로 갈리어진 나의 묵주기도까지. 그리고 새벽에 일하는 내 자신에도 익숙하다. 

나는 글도 새벽에 쓰고 행정적인 일도 대부분 새벽에 시작한다. 글을 쓰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앞마당을 걸으면서 묵주기도(默珠祈禱)를 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란 불교에서 염주를 돌리며 하는 기도처럼 구슬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기억하며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방식의 기도이다. 문제는 되풀이하는 기도라, 잡념이 들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애호한다. 그 원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설은 이렇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읽지 못했고, 따라서 성서에 준 한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를 반복하는 방식을 전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구슬을 굴리면서 묵상하는 기도’라는 뜻에서 묵주기도라고 부른다. 서구권에서는 ‘로자리(rosary)’라고 하는데 장미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로자리에 대한 설도 많다. 예수의 생모인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순수한 장미로 표현한 것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또 종교탄압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공장소, 주로 콜로세움 같은 운동장에서 처형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굶은 사자를 풀어서 신자들이 잡혀서 먹히도록 했는데, 그들은 머리에 장미로 만든 화관을 쓰고 광장으로 행진했다는 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체는 먹히고 장미 화관만 남기었다는 것이다.  

나보다 하루를 더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새벽에 일터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그중의 한 부류이다. 집 앞마당에서 캘리포니아의 중요한 동맥 역할을 하는 405번 프리웨이가 약 반 마일 정도 보인다. 405 프리웨이는 5번에서 파생한 고속도로로, 북서쪽 방향을 커버해 주는 약 72마일 구간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차가 오가는 고속도로다. 북쪽 실마(Sylmar)와 남쪽 엘토로 와이(El Toro Y) 사이를 연결한다. 이 길을 따라 깜깜한 새벽에, 남쪽으로, 북쪽으로 헤드라이트, 백라이트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일터를 향해 가는 새벽 사람들이다.  

오늘도 앞마당에는 배달된 신문들이 널브러져 있다. 신문 배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우리 집에 다녀간 것일까. 그는 신문을 배달하고 또 다른 직장을 향해 서둘러 갔을지도 모른다. 신문 배달로 버는 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안다. 신문 배달원뿐만 아니라, 나와 남편이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딸도 어둠을 헤치고 환자를 돌보러 병원으로 향한다. 

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일이나 공부보다 더 엄숙한 것’이라는 심오한 뜻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를 일깨웠던 것은 가난도 아니고, 전쟁의 상흔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10대 끄트머리의 소녀시기를 지나 막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길에 첫발을 내디디던 때이었다. 사르트르, 톨스토이, 카뮈 등등의 꽤 어두운 사회론자들의 글을 읽고 친구들과 ‘개똥철학’을 토론하던 때이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함, 어두움을 논하던 나의 눈에 강의실 곳곳을 열심히, 성실하게 닦고 있던 청소부 아저씨의 맑고, 진지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존재가 나를 일깨웠다. 그를 통해 가난과 노동 그리고 그로부터 받는 엄청난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대가는 우리의 행복이나 희망과는 별 개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사치스럽고 아이러니한 문구를 기억한다. 현대 사회는 일과 노동을 구분한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당시 6억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4년 82억으로 늘었다. 세계 총생산은 199배가 늘어난 173조 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빈부의 차이는 극(極)과 극이다. 일과 노동이 뒤얽힌 결과다. ‘신성한 일’이 아니라 ‘먹고사는 노동’에 매일 끌려다닌 것이다 

그 중년의 청소부 아저씨는 노동의 숭고함에 신경을 쓰며 일했을까. 자식들을 먹이고 키우느라 수고하셨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이상을 갖고 일을 하고, 품을 팔았을까.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현재 노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벽을 가르는 현대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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